사람이 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그 말의 무게는 한없이도 무겁기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은 방학의 일이었고, 까칠했던 자신을 내가 들여다보지 않는 어둠 안에 차갑게 죽어있기 때문에 이 말은 완벽히 증명된 가설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오만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었다. 웃음은 감정을 포장하기에 완벽한 리본이니까. 가시를 대신해서 내세운 나의 웃음은 과연 전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뀐 것일까.
이 목적없고, 근본을 알 수 없는 대화에 욕심을 부리는 이유로 과거의 그 나른한 대화가 되기에는 미약했다. 날카로운 가시돋힌 대화였으니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너와 나는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상대에게 '혹시나'하는 걸지 않는 기대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라 멋대로 단정지었다. 네게는 해당되지 않는 단정일텐데.
가까이서 보면 필히 비극일 사람들,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삶은 글 몇자로 적어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수학처럼 증명된 사실만을 따라 결과를 도출하는 것과는 달리 삶은 계속된 미지수를 던지고, 잘못된 계산법만을 알려주니까. 이제야 겨우 제 의지로 한 줄을 적어내린 나는 알지도 못하는 네게 또 하나의 수식을 던져줄 수는 없었다.
후회할게 될 것이라는 네 말은 내 생각을 바뀌게 할 수 없었다. 후회하지 않을 근거없는 확신이 들었고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이득이 없더라도 그냥. 두서없이 말을 하고 싶었다. 우리의 대화에서부터 이미 수식은 틀렸으니 바로 잡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후회하려나. 후회하면 내 손해겠지? 넌 다 잊을테니까."
후회하는 순간이 올거라면 아마 상관없을거라 생각한다. 끝까지 붙잡고 그 순간까지 끌고가더라도 내 손은 그 줄을 미련없이 놓아버릴테니까. 실로 무의미한 대화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과거의 대화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과거의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른 사람인데 비교하는 것은 성립이 되지않으니까. 고개를 내젓고는 제 앞에 있는 '빅터 아델버트'를 봤다.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만 결국 속은 같은.
과연 너는 나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틈이 생기는 이 관계는 메꿔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매끄러워 보이나 거친 표면을 가진 나는 맞대보면 완벽하게 불일치할 것이다. 태생부터 그어진 선이 다르니까. 나는 좀 더 나은 삶을 걸어왔을지 몰라도 제 숨 쉴 구멍 하나 만들기 위해 거짓된 삶을 살았다. 남의 그림자에 가려져 자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했던. 지금도 그리 연연하고 있다. 내가 그림자를 만든 빛이 된게 아니니까. 또 다시 선이 그어지고, 우리는 멀어진다. 의도적으로.
"그 말은 괜히 이어나가지 말라는 소리네. 근데 어쩌지, 난 이어나가고 싶은데."
두 번. 또 다시 선을 아슬하게 지키며 네 심기를 긁어낸다. 이득될 건 없었음에도 오로지 내 욕심으로 이 대화는 이어진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기대는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끊길 것이다.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 반복되는 제자리 걸음은 앞으로 나아갈 줄을 모르고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네게 던지고 싶은 말이 목구멍 끝에 걸려있었지만 그 말이 무엇인지 나는 가늠하지 못했다. 무의식 중에 내가 거부하고 있는 것일테지만서도 알고자 하지 않았다. 떨어지는 시선에 이제는 나도 시선을 돌렸다. 욕심부려 너를 담아도 결국 기억하는 것은 네 이름뿐일 것 같아서. 괜히 네 눈빛이라도 기억하려 발버둥쳐도 달라질 건 없으니까.
네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애초에 이 대화가 이어지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었으니까.
조금씩 이 대화가 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어나가고 싶다는 내 욕심이 앞서고, 네 말에 나는 그 끝을 이어나간다.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생각하는건 이미 멈췄다.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그건 정말 선을 완전히 넘어 들어가는 주제넘은 행동임이 틀림없으니까. 번진 이 관계의 끝은 그냥 빗물에 젖은 그냥 양피지 한 장이다. 가지고만 있으면 짐이 될 뿐인, 쓸모없는.
"맞아, 잘 알고 있지. 그냥 한 번 장난쳐볼까 싶어서."
정말 의미없이 던진 말인지라, 장난으로 의미를 만들어냈다. 결국 자신도 사랑따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남에게 애인이 되라니 얼마나 잘못된 문장인가. 다시 마주친 금빛의 눈은 널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속으로 내게 질문을 던지려하나, 그냥 삼켜버리는 그 눈을 모른척 했다. 결국 던져지는 질문에 진실된 대답을 내어줄 수 없는걸 알고 있으니까.
"모든 걸 내려두고 새롭게 사라지려는 것 같아서 그 기억도 잊은 줄 알았지."
나은 것은 없다. 모순적인 이 관계는 애초에 나은 것을 찾기 힘든 관계이니. 웃음을 짓는 것은 나를 숨기기 위함이요, 내게 다가가지 않는 또 다른 선에 불과하다. 속에 가득했던 쓴 맛은 이제 입 안에 남아있지 않았다. 쓴 맛에 무뎌진건지 일방적으로 무시한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의연하게 미소 짓는다.
다른 방향으로 디디는 발걸음은 물의 파장이 퍼지듯 은은히 존재를 드러내며 퍼진다. 다른 곳을 보고 있지만 그 파장은 네 파장과 겹쳐져 사라진다. 계속해서 그 것들은 부딪치고 사라지기를 반복할 것이다. 조금씩 강해지는 발걸음에는 바다의 파도처럼, 벽에 구멍을 만들어낼테지만 우리 사이에 있는 이 벽은 금이라도 갈지 모르겠다. 금조차 가지 않을지도 모르고. 내심 물어보고 싶었다. 거리를 두고 네 곁에 존재해도 되는지. 아무것도 없이 그냥 서로의 존재만 알고 있는 그런 관계로 괜찮은지. 이 짧은 질문은 또 다시 내 어둠 속으로 삼켜진다. 결론이 나올 질문이 아닐테니까.
혹시나하는 걸지 말아야할 기대, 넘지말아야할 그어진 선. 지켜야할 것들이 아주 많았고, 목적지는 서로 달랐다. 그렇지만 혹시나하는 기대를 걸고 싶고,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고 싶다. 나는 이 곳에 남아 남들에게 칼을 들이미는 사람이 될테고, 언젠가 내 목에 스스로 칼을 집어넣을지도 모르는 길을 달리고 있으니까. 그러니 나는 내 칼을, 내 팔을 쳐내줄 사람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굳이 너일 필요는 없으니 나는 지켜야할 것들을 한 치의 오차없이 지킨다. 남에게 거는 기대따위 지켜질리 만무하고, 특히나 네게는 걸지 않기로 했으니까.
"다행이네, 피난처라도 있으니까. 어차피 같지도 않았지만, 나랑 달리 돌아갈 곳 정도는 있어서."
내게는 평생없을 유일한, 나는 가질 수 없을 피난처. 꽤나 부러운 기분이 들었으나 내 업보라 치부했다. 결국 나는 혼자 걸어야 하는 외로운 싸움이었고 내 곁엔 누구도 맴돌 수 없을테니. 네가 돌아갈 곳은 어디일까. 네 피난처는 영원히 유지될 피난처인가. 하는 건방진 생각이 든다. 평가할 수 없고, 계산할 수 없다. 첫 시작이 아예 다른 이 증명은 누구도 간섭하지 못할 수식이다. 네겐 없지만 내겐 있고, 내겐 없지만 네게는 있는 것들은 그냥 유일한 것으로 단정짓고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그게 나의 생존방식.
스스로 합리화하는 회피, 똑바로 마주하지 않는 나의 죄.
이걸로 나는 또 다시 거짓된 삶을 산다. 나 자신까지 속이는 '스스로'가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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