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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넬 E. 베르폰

흑백으로 가득했던 저택을,

그라티아 방학 로그 - (https://qkrwlswn176.postype.com/post/6709814)

 

파도소리가 가득 복도를 메꾸고 있는 저택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방학과 다름없는 하루였지만, 이제 방학이 아니니 의미는 달랐다. 지루했던 하루가 반복하던 때 네 편지가 도착했다. 언젠가 네게 말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졸업 후에는 시간이 내 기억을 삼켜 조금씩 잊혀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는 내 시간이 흐르기 전에 다시금 날 잡아주는구나. 바로 펜을 들어 네게 답장을 보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네가 내 눈 앞에 오기전까지 내 시간은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흑백으로 가득했던 베르폰에 붉은 뱀 한마리가 찾아왔다. 내 시야에 붉은 네 눈과 머리카락이 들어올 때, 빠른 속도로 달리던 시간이 속도를 늦춰 흘러가기 시작했다. 점점 잊혀질 기억일테지만, 이 순간은 잊고싶지 않아. 서로 마주친 눈빛은 같은 붉은 빛으로 선명히 빛났다. 환한 미소와 함께 제 품으로 들어오는 너를 함께 안아주었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체온일까.

 

"너무나도 보고싶었어요, 이그넬 선배!"

 

이 곳이 슬리데린 기숙사 휴게실이었는지, 빠른 속도로 그 어두운 기숙사를 스쳐 현실로 돌아왔다. 제게 매달리며 어리광을 부리는 네가 참 그리웠음을 깨달았다. 정말 보고싶었나봐. 영원히 이쁨받고 싶었다는 네 말에 영원히 예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는 말을 하려다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웃음으로 감췄다. 이리도 기뻐하는데 기분을 잘라낼 순 없으니. 네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저택 복도를 지나 호기심 가득한 네 눈에 차가운 베르폰을 담았다. 베르폰에 붉은 뱀이 스쳐가니, 색들이 살아났다.

 

해가 지고 달이 찾아올 때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나르는 사람을 제외하면 정말 단 둘이서 식사를 했다. '베르폰에서 다른 사람과 밥을 먹는 일이 다 있네.'하며 얌전히 입에 음식을 넣었다. 재잘거리는 네 말에 반응하며 간만에 즐거운 식사를 했다. 먹여달라는 네 어리광을 멈칫하며 빤히 바라봤지만 결국 연인처럼 먹여주고 꽤 긴 저녁식사를 마쳤다.

 

저녁을 지나 달이 베르폰의 머리 위를 지날 때, 어쩐지 오늘의 하루가 아쉬웠다. 조금 더 천천히 시간이 흘렀더라면 더 아쉬웠으려나. 그러다 시간이 부족하면 늘리면 되지않겠느냐는 생각이 났다. 어차피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이 저택에 뱀 한 마리 들어왔다고 누가 신경쓰랴. 거절을 하지못하도록 쐐기박듯 질문아닌 통보식으로 물었다. 

 

"자고 갈거지?"

 

너는 입으로 온갖 예를 갖추며 실례를 범할 순 없다고 했지만 네 또 다른 자아는 당장이라도 그러고 싶다며 대답을 대신했다. 장난이나 쳐볼까 하는 심정으로 안자고 갈거냐고 놀리고 싶었지만 사랑스러운 네게 무슨 장난을 더 칠까. 한 번 더 자고 가라고 빤히 쳐다봤다. 너는 기다렸다는 듯 잠옷을 꺼내 내게 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잠옷을 빤히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어 잠옷을 입었다. 잠자리에 들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 같은 침대에 몸을 뉘어 그간 오르골로만 듣던 네 노랫소리를 들었다. 여전히 행복한 웃음을 짓는 네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그간의 공백을 채웠다.

 

조잘거리는 네 목소리는 시간을 흘러 점차 아래로 가라앉았고, 제 품에서 색색거리며 깊은 잠에 들었다. 아이의 얼굴을 가리는 붉은 머릿결을 조심스레 넘기며 미소지었다. 네 노랫소리에도 여전히 오지않는 잠은 이 긴 밤, 나를 홀로 내버려두었고 자는 너를 침대에 고이 둔 채 나는 또 다시 밖으로 향했다. 네 노래로 잠재운 파도를 다시 일깨우러.

 

아침의 해가 찾아오기 전에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파도를 일깨운 내 지나온 시간을 너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네 곁에 나란히 누워 눈을 감았다.

 

다시는 없을 나의 붉은 하루는 '행복하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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