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으면 짧고 길면 긴 방학을 보내고 새로운 학년의 시작, 첫 날.
망토 소매를 펄럭이며 다가온 네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평범히 인사를 건넸고, 안부를 물었다.
정작 물어야할 자수 얘기는 뒷전으로 미뤄두고 짧아진 내 머리카락에 대해 얘기하다, 방학동안 주고받았던 편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고. 망토 안쪽에 뱀을 새겨오겠다고.
" 자수는 이제 좀 잘하나. "
" 뱀이에요. 나름 귀엽게 된 것 같지 않나요? "
기대감없이, 형식적으로 물어본 말에 뿌듯하다는 듯이 팔 소매를 들어 새겨진 뱀을 보여주었다. 엉성하게 새겨진 작은 뱀 한 마리. 손 끝으로 매만지며 실의 방향을 따라 뱀을 쓸어만지고 다른 뱀을 찾았다.
붉은 혀의 뱀을 새겼으니, 이번에는 검은 혀의 뱀을.
" 혀가 붉은 색이네, 한 마리는? "
" 나머지 한 마리는 이그넬 망토에 넣으면 어떨까 해서요. 어떠세요? "
탐탁치 않았다. 정해진 교복에 다른 무언가를 새기는 것은 어찌보면 교칙 위반일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거절할 순 없었다. 자수를 제안한 것도 나였고, 망토에 새기라고 한 것도 나였으니. 다른 방도가 없으니 네게 소매를 내밀었다. 마음에 안들면 새 망토를 사면 되는 일이니까.
" 그럼 제 것처럼 망토 소매에 해드릴게요. "
소매가 네 손에 들려 꿈지럭거리며 주름져가고 바늘 끝에 달린 실이 오고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봤다. 조금씩 새겨지는 초록색에 검은 혀의 뱀 한마리가 망토 소매 끝자락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 지루해질 때쯤 소매에서 떨어지며 꿈지럭대던 손이 떨어지고는.
" 어떠세요? 귀엽죠? "
하며 내 반응을 살피는 네 눈에 싱긋 웃음이 나왔다. 꽤 기특하게도, 엉성한 뱀 한 마리를 탄생시킬만큼의 실력을 키워왔으니 부족하지 않을 칭찬이었다. 다시 손 끝으로 금방 새겨진 뱀을 매만지자, 아직 떠나지 않은 네 손의 온기가 남아, 정말로 새겨진 뱀의 비늘마냥 만져졌다. 앙증맞게 혀를 내민 뱀은 네 망토와 같이 자리잡았다. 작디작은 엉성한 뱀.
" 응, 귀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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