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담는 시선안에는 무엇이 담겨있는건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겠지만 괜스레 마주친 시선 안에는 무언가 담겨있음을, 나를 향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호의인지 악의인지를 구분하는 나의 판단은 분명 네 앞에서 흐려짐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럼에도 무심히 마주친 시선을, 헤집어놓는 네 눈빛은 이득은 없었지만 꽤나 욕심이 나게하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나를 향하기를 기대하고 있으나 바라지 않는다. 바뀌기를 바라고 있으나 강요하지 않는다. 모순적이지만 이것이 너와 나의 관계이리라.
"주어를 제대로 붙었어야 했나. 그냥 대화가 좋은게 아니라 너랑 하는 대화가 좋은거라고. 말안해도 알아챌거라 생각했는데, 이제부터는 제대로 말해야겠네."
기대를 걸지않을거라 네게 말했지만 무의식 중에 분명 나는 네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어진 둘 사이의 이 선이. 아주 가늘게 그어진 날카로운 칼날이. 정확하게 나를 향하고 있더라도, 이 칼날에 베여 상처가 나더라도 넘어가고 싶었다. 왜일까. 이런 욕심이 드는건.
넘지않을 선을 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 마냥 나란히 걸어보면서도 어느새 선은 다시 저 멀리로 그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의식과 의식의 싸움일까. 기왕이면 무의식이 이겼으면 좋겠는데. 아직 다 지워지지않은 내 선들이 곡선없는 네 선과 맞물린다면 그 사이에 있을 거리는 얼마나 겹쳐지는걸까, 멀어지진 않겠지. 하며 괜스레 비웃음이 났다. 겹쳐지기는 할까 싶어서.
"좋아, 얘기하기 싫어하는 듯 하니 더 묻진 않을게. 그럼 내가 바라는 주제말고 너가 바라는 주제에 대해서 얘기하는건? 아, 선을 넘어버리는건가."
분명 약간의 선은 넘었으리라 생각했다. 분명히 좋지않은 방향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함께. 내 시선은 계속해서 너를 향했다. 나와 닮은 지금의 너를 좀 더 나의 눈에 담고 싶어서, 그 외의 이유를 찾았을지도 모르지만 알려고도 하지않았다. 이유를 아는순간 멈추는 법을 잃은채 선을 보지않고 달리기만 할 것 같아서였다. 다가가고 싶음에도 다가가지 못하는 나는 강한척을 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때의 네 손을 꼭 잡아, 지금까지 놓지않았더라면. 나에게 네 시간을 할애하지말라는 말을 던지지 않았더라면 서로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있을까라는 궁금증도 들었다. 그 짧은 방학동안의 시간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데 충분한 시간이었고 우리는 변했다. 그러니, 그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을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는 것을 멈췄다. 흘러넘쳐 여기까지 번진 이 관계의 끝은 흐릿해질지. 끝까지 남아 한 점의 작품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바뀌어버린 우리는 평행선을 걷는 것 마냥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아직도 네게 괜한 욕심을 부리며 이 의미없는 대화를 지속하는 이유는. 필히 과거에 묶여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네가 한 말들이 아직도 내 안에 각인처럼 박혀있기 때문에.
'밀어내기만 하며 외롭지않을거라 자부하다니 오만해.'
이 말이 여직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말을 하는 널 앞에 두고 나는 과거를 회상했다. 모든 것을 감춰 선을 그었던 내 어둠은 이제 나조차 들여다보지 않는 어둠이 되었음에도 나는 그 어둠을 무시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준비되어있지 않은 이 대화는 태연하게도 오고갔다. 한가지 분명한건 나는 너를 올려다 보고있다는 것. 이 후에도 널 내려다보지 않을거라는 확신이다. 나만 가지고 있을 확신일테지만, 분명 너도 알고 있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야 나는 너를 넘어설 생각이 없으니.
"눈 맞춰줄 상대가 애인밖에 안되면 그 애인 너가 하면 되겠네. 해볼래?"
분명 의도한 대답은 이게 아니었을테지만 나는 또 한 번 너가 싫어할 행동을 했다. 정말 그릇된 생각이었을테지만. 시선을 옮기는 네 눈을 따라 빤히 쳐다봤다. 곧 있으면 담지못할 눈. 가히 잊지못할 눈이었으나, 시간은 내 기억 속에서 그 것을 지워버릴 것이다. 결코 잊지않을것이라 다짐하며 계속해서 내 기억 속에 네 눈을 담았지만 욕심 가득한 오만일뿐.
"생각보다 과거의 나를 잘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네."
싱긋.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어째선지 쓴 미소가 지어지는건 꽤나 아픈 일이었다. 점점 대화가 이어질수록 과거의 너와 지금의 너를 비교하고 있었다. 이러면 안되는건데. 나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던 그 대화가 왜 자꾸 떠오르는걸까.
서로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으나, 우리는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게 우리겠지. 아니, 우리라고 칭하기에도 과분한가.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직도 속은 쓴 맛으로 가득했다. 다른 맛은 기대하지도 않으니, 이 쓴 것들은 사라지기만을 바라지만 기억되었으면 한다. 분명 나를 옥죌것이고 숨을 막을테지만 욕심을 냈다. 이것들은 잃어버리기에는 아까운 것들이었다.
대답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너를 보고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애초에 대답을 원하고 던진 말은 아니었으니. 그냥 걸었다. 발이 닿는 곳에 걸음을 디뎠고, 머릿속에 떠오른 말들을 네게 던졌다. 과연 네 머릿속에 나에게 던지지 않은 말들은 얼마나 쌓여있을까. 그것이 나를 향한 멸시일지라도 던져졌으면 하는 바람을 삼켰다. 입에 머금고 있는 것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테니까.
"머리카락 건들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한 번 건들여보고 싶은 것도 같고. 나 지금 머리 기르고 있는건데. 그렇게 티 안나나."
쳐내진 손을 들어 제 머리카락을 몇번 쓸어보나 길이가 짧아 쓸어내리는 느낌이 부족했다. 널 보며 또 다시 싱긋.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또다시 속내를 감추었다.
"궁금한게 생겼는데, 전에 최후의 피난처 얘기한거 말이야. 그때의 나는 그런 피난처 없었는데. 지금의 너는 피난처 만들었어? 대비하는게 좋을거라고 너 입으로 그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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