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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넬 E. 베르폰

정점에 다다랐으나,

2004년, 이그넬이 25살이 되던 해. 소리 없이 그는 죽음을 맞이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밖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오늘따라 잔잔히도 불어, 창틀을 흔들지 않았다. 분위기가 가라앉고, 베르폰의 저택조차 그의 죽음을 아는듯 고요하다. 울부짖는 비명들조차 들리지 않았다.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를 동경했으나, 내 어린 시절을 갉아먹었으니 그리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어찌 그의 죽음을 기리겠는가.

 

그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외로이 자리를 지키며 그를 떠나보냈다.

검은 색의 정장을 입는 내 눈은 붉지만 어둡게 일렁였고, 그 눈에는 조금의 눈물조차 맺히지 않았다. 덤덤해진 것인지 이제야 해방되어 홀가분한 것인지 애매한 감정들이 뇌에서부터 속 깊은 심장까지를 오가며 다툰다. 온갖 기대들을 받아, 감정에 무뎌진 내 심장은 나를 거부하고, 진심을 덮었다. 끝내 원했던 욕심의 끝이 찾아왔다. 원하는 당신의 자리를 얻었으니 만족하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오직 비명소리가 가득하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 하나 없는 이 황량한 저택에 나는 홀로 서 있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가장 빛나는 자리에서 나는 그의 길을 따라 태양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올랐다. 원했던 정점, 당신을 잡아먹고 일어선 이 자리는 그 어떤 자리보다 황량했다. 아니, 내가 그리 만든건가. 내려본 이 곳은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 곁에 있을 사람도, 날 적대해줄 사람도,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조차.

 

밀어내기만 한 나의 과정에 대한 결과다. 내가 쌓아온 인과에 의한 손해.

오만하게도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믿었고, 건방지게도 외롭지 않을거라 치부했다. 이 얼마나 오만방자한가. 나는 또 나를 속여, 진실을 거짓이라 덮으며 믿는다. 앞으로의 길은 막힘없이 흘러갈 것이고, 타오르는 불씨는 어디든 태우며 번져나가겠지. 나는 꺼져가던 불씨를 지펴 나 자신을 태울 것이다. 가려졌던 그림자가 사라지고 나는 타오른다. 원하는 당신의 자리를 얻었으니 상관없어.

아니, 이조차도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걸지도 모르지.

 

….

 

그런데 타오르다 잿가루가 되면, 나는 어디로 흩날리지. 

 

결국 정점에 다다랐으나.
그곳엔 그 누구도 없다. 모든 것을 제 발치에 내려둔 그는,
남들보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가장 많은 것을 잃었다.

 

많은 것을 누리지만.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강하게도 내리친 돌들은 서로 부딪혀 불꽃을 튀긴다.
어느 메마른 곳에 닿으면 금세 번져 하나의 불로 타오르겠지.
타오르고 타올라, 가장 강한 빛을 발하고 그대로 추락할 것이다. 하나의 재를 남기며.

 

타올라라, 빛에 가려져 타올라라.

열기가 하늘과 맞닿을 때, 사자는 추락할 테니.

그림자 속에서 타올라라.

 

그가 당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 불씨를 꺼뜨리지 못하도록 종잡을 수 없이 타올라, 재로 죽어라.
내 욕심이 모든 것을 집어삼켜, 그 어느 것보다 뜨겁게 타올라 차갑게 식어가기를.
제 자신을 부싯돌 삼아 내리치며 타올라라. 나는 어둠 안에 감춰진 타오르는 불꽃이니.
스스로를 불사 질러 온 몸이 타오르고 있음에도, 타올라라. 그 끝은 허공에 흩날릴 잿가루일 테니.

 

(*지인분 지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