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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넬 E. 베르폰

누군가가 울부짖는 울음소리였다.

Lonely

/ Noah Cyrus_youtu.be/JhvyWCyXuqg


언제나 홀로, 누군가가 곁에 있어도 그것은 그저 나를 향한 칼날이었을뿐. 조금의 온기조차 없던 흑백으로 물든 베르폰은 더 이상 내게 안정을 주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과 창틀을 때리는 매서운 파도들은 잠시의 혼란을 가라앉히는 또 다른 소란이었다. 그 소란이라도 잡으려 어둠으로 가득한 새벽을 찾아 나를 내던졌다. 그 어둠이 나를 삼켜 잠을 갉아먹었지만 나는 안정을 찾고 있다고 느껴졌다. 안정이라고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 서늘한 새벽이 조금은 따뜻했다.

 

그 짧지 않은 밤을 지나 새벽이 다가오고 바다의 수평선 너머로 아침의 해가 찾아오면 차갑고 서늘한 새벽에 빛이 새겨지고 하늘에 주홍빛의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 온기가 나의 혼란에도 스며들어 어둠을 드러내면 온기를 잡아먹고 나는 타오르지 못한 불씨의 그림자가 되었다. 빛이 떠올랐기에 생긴 그림자, 존재하지 않는 불씨의 그림자. 참 모순된 몇글자의 정의가 나의 존재였다. 고작 구석 자리 한 켠에 작은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던 작은 나는 너무 완벽히 흑백에 물들어 있다. 흑백에 섞여 흐릿하게 보이던 눈이 점점 색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빛을 찾지못해 가야할 길의 방향을 찾지 못했다. 어둡게 일렁이는 나의 붉음을 피비는 찾을 수 있었다. 나의 하나뿐인 가족. 피비, 나의 유일한 자. 찬란한 나의 것. 그가 있으면 나는 흑백이 아닌 붉음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어둠에 잠든 베르폰의 새벽에서 나는 다르게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것은, 내 유일은 나의 곁을 떠나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갔다. 새하얀 뼈를 남긴채.

더 이상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이 사라졌다. 내 붉음을 찾아줄 사람은 없다.

 

나의 유일은 내 곁을 떠나 뼈를 남겼으며 나는 그대로 자리에 멈춰섰다. 피비가 남긴 모든 온기를 찾아 허덕였다. 뭍으로 나온 물고기 마냥 물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속으로 문드러지는 감정들을 숨기려 겹겹이 거짓을 쌓아올렸다. 물기없는 모래로 쌓아올리고 올려 그 끝이 무너지고 있는지도 모르는채로 그 안의 어둠을 감추기에 전력을 다했다. 나는 물이 필요했다. 모래를 적셔 단단히 만들어줄 물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타올라야 했기에. 나를 가렸던 저 빛을 삼켜야 했기에 나는 물을 찾지 않았다. 진실을 무시하고 덮은 거짓이 옳은 길이라 믿으며 앞으로 향했다. 결국 올라선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모순된 정의라도 있던 나의 존재는 이제 무엇으로 정의되어야 하는가.

타오르던 해는 이제 다시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 가는데 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 저물어야 하는걸까. 자리를 차지했지만,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 자리가 이리 황량할 줄 알았더라면 나는 그냥 타오르지 못한 불씨로 끝을 맺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끝을 알고 있음에도 내가 타올랐을수도. 한 번 타오르기 시작한 불은 종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분명히 붉고 크게 타오르고 있다. 그러나 홀로 타오르는 그 불이 너무나도 차가워서 그리워하지 않을거라 믿었던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퍼지는 불씨들이 새하얀 재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불씨라 칭할 수도, 불이라 칭할 수도 없는 무언가 타올랐던 잔재의 정의는 바람에 흩날려 '없던' 것으로 정의 되려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반복된 나날의 하루였다. 하늘을 가득채운 구름들이 날씨를 탁하게 만들어 우중충하게 만들었다. 이런 날씨에 새로운 무엇을 찾아내기는 힘들지만, 나의 저택에는 한 마리의 박새가 찾아왔다. 나의 욕심을 채워줄, 나의 붉음을 찾아줄 사람이 되어줄, 나의 또 다른 피비. 손을 뻗는 자리에 박새가 닿았고 그의 푸른 빛이 베르폰에 스며들기 시작할 때 어니스트는 또 다른 피비가 아닌, 그냥 어니스트였다. 손을 맞잡았고, 그의 온기가 필요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는 그를 찾아 침대 가장자리를 쓸었고 다른 이의 온기를, 다른 색깔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그를 쫓았다. 홀로 앉던 나무 아래에는 이제 다른 사람의 흔적이 묻었고, 피비가 묻힌 그 땅에는 새싹이 올라와 또 다른 생명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잊혀지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기억들은 선명히도 남아있지만 또 다른 기억들 사이에 묻혀 그 경계가 조금 흐릿해졌다. 그렇게 내가 숨겨두었던 어둠의 경계까지 흐릿해지기 시작할 때 깨달았다. 걷고 있는 이 길이 너무나도 익숙해져서, 태워진 나 자신을 직면하게 된다면 또 혼자가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바다 아래 가라앉아 발가락에 닿은 모래가 나를 끌어내리기에 이미 허벅지까지 잠긴 압박감은 상당했다. 이 압박감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어니스트가 알게된다면. 또 다시 가족을 잃게 되는거라면. 번져나가는 불마냥 한 번 시작된 두려움은 종잡을 수 없었다. 레오폴드, 당신도 이런 두려움을 느꼈을까. 당신은, 어찌 그리 차가웠던거야.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을거라 믿었던 당신의 돌 앞에서 읖조렸다.

흙 사이에 파묻힌 더러워진 돌멩이 하나로 정의된 레오폴드 당신은,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있는데. 나는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았으면 한다는 허상을 꿈꾼다. 옥죄이는 심장을 붙잡고 한 곳에 고이기 시작했다. 썩어가는 감정들이 나를 좀먹고 어두운 밤하늘에 떠오른 달무리가 여느때보다 밝게 빛난다. 고인 물에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와 같이 썩기 시작한다. 수면에 뜬 달은 그 곳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 달빛을 찾아 허우적거린다. 그 곳에 달이 있다고 믿으며, 나의 유일을 찾겠노라 말하며.

죽음은 그저 이 긴 삶의 종지부일 뿐이니까.


한 달쯤, 누군가 내 곁에 없는 것에-네 곁에 내가 없는 것에-익숙해지기 위해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공허한 옆자리가 너무나도 시려서 사무치게도 아파왔지만 참았다. 결국 견뎌야할 모든 것이었으니까. 홀로 걷는 거리가 사람들로 꽤나 부볐으나 동떨어진 거리감이 느껴져 주머니에서 손을 빼낼 수 없었다. 너무 강하게 쥐고 있는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검붉게 썩은 나의 피를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목적지없이 길을 걷고 또 걷다가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나도 멀쩡해보여서 미간이 찌푸려졌다. 속은 썩을만큼 썩었으면서 겉모습은 다른 사람과 다름없이 깨끗하다니. 조금은 초췌해보이나. 건물 틈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파란색을 잃은 하늘에서 아니나 다를까 비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리창에 마주친 내 모습에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한채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음에도 진흙 위에 서 있는 듯한 질척한 무게가 더욱 아래로 끌어내려 예고도 없이 내린 비마냥 눈물을 비집고 흐르게 만들었다. 눈을 꾹 감아도 눈꺼풀을 벌려 새어나오는 눈물이 비릿한 비냄새와 섞여 바다향을 생각나게 했다.

 

'보고싶어.'

 

우습게도 베르폰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짙은 바다향이 옅게 베어있는 네 품을 잡아 안고 싶었다. 한순간에 무너지는 감정들이 눈물에 섞여 흘러내리고 소리없는 소란을 만들어냈다. 그 후로는 본능적으로 베르폰으로 돌아갔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빗물을 흘리며 베르폰의 입구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네가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차갑게도 식은 방 안은 촛불 하나 없이 어둡게 그대로였다. 조금의 먼지도 쌓이지 않은 것을 보고 아직 이 곳에 네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라티아의 작은 노랫소리로 붉게 물들었던 그 날의 하루처럼 오늘따라 베르폰은 아주 조용했다. 잡생각들이 내 뇌를 가득 채울 수 있을만큼 고요했다.

 

흐린 하늘 너머로 몰래 해가 저물어가고 하늘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달조차 얼굴을 내비치지 않은 어둠에서 익숙하게 나는 촛불을 켜 정신을 차렸다. 앉은 책상 위에 올려진 옛날의 편지들이 당장의 온기를 대신했다. 편지에 담긴 각자의 향이, 또다시 과거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슬리데린의 기숙사 벽난로 앞에서 간식을 먹던 너희들을 보면 나는 정말 평온했는데. 과거에 얽매인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기억들은 가볍게 잊어야 하는데. 울컥이는 감정에 아슬하게 담겨있던 물잔 끝으로 물이 흘러내린다. 흐르는 물이 바닥의 모래를 단단하게 만드나 이미 무너져 사라진 모래를 다시 쌓을 수는 없다.

 

손에 잡히는 펜을 집어들어, 네게 쓸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양피지에 펜을 올리자 어떻게 시작을 해야할지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잉크가 떨어져 번져나갔다. 다른 양피지로 바꿀 생각은 하지 않은채 그 아래에 첫 마디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 미안해. ]

 

아무렇지 않게, 안녕.

/ 박혜원_youtu.be/V3JM-xE2Nsc

기다리던 너에게 이별을 건넨다면 아무렇지 않게, 안녕. 말할 수 있길.

언제 이 글을 썼는지는 굳이 알아야할 필요 없을 것 같아. 언제 돌아왔는지도 얘기해주지 않을거야. 그냥 너한테 짧은 한마디라도 적고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적는 것뿐이니까. 못읽을수도 있겠지만 그냥 내 이기심 때문이라고 생각해. 
즐거웠어. 따뜻했고, 아마 나에게 유일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만큼 소중했어. 아무도 내 곁에 남아있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너를 곁에 두고 네 온기를 찾고 있더라. 넬이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벌써 익숙해졌으니 조금 우스울지도 모르겠고. 바다향에 네 향이 조금 섞였더라. 보고싶었어.

어니스트, 울지말고 날 사랑한다면 나를 잊어. 베르폰은 네게 남길테니 오로지 네 것으로 만들던지. 
이게 사랑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사랑이 맞다면 널 사랑하는걸지도 모르겠어.

눈물에 살짝 번져나간 글씨체에도 신경쓰지 않고 편지를 접었다. 엉성하게 끝을 맞추지도 않고, 마치 메모라도 해놓은 것마냥. 이름도, 날짜도, 각인도 전부 새기지 않고 그저 그대로 달랑 양피지 한 장을 들고 다시 베르폰을 나섰다. 유일히 바다향만이 가득한 동굴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조금 구겨진 편지를 그 동굴 안에 고이 숨기고 앉았다. 이제 마지막일텐데, 뭐가 이리도 평온할까. 무엇이 이리도 벅차오르는걸까. 흐르던 모래의 그 아래는 보이지 않는 바닥이었다. 발을 내딛고 있으니 끝없이 삼켜졌지만 그 끝을 알 수 없어서 멈추지 않고 삼켜지는 것이겠지. 한 발, 한 발을 내딛뎌 언제나 서 있던 그 절벽의 끝자락에 아슬히 서 있자, 파도바람이 나를 그 끝으로 내몰듯 세차게 불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은 내가 유일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죽음은 그저 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할 마지막 문장인걸. 크게 한 숨을 들어내쉬고 그 아래로 나를 던졌다.

 

사그라들줄 모르고 타오른 불은 새하얀 재를 남기니.

허공으로 퍼지는 것은 가히 불이 남긴 것이라 칭할 수 없다. 그것은 존재했고, 존재를 잃었다.

정의 내릴 수 없는 불의 잔재는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져 없던 존재로 정의되었다.

 

모든 것은 삼켜버릴 수 있는 것은 너를 보호할까, 집어삼킬까.

붉게 흩날리는 불씨에 쉬이 겁먹지 말아.

네 몸이 재가 될 때까지, 불타오르는 것을 멈추지 말아.

타오르는 화염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집어삼킬테니.

 

이그넬 E. 베르폰, 허공에 사라진 잿가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