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보다 추웠던 겨울은 지나갔다. 길었던 밤을 지나 조금씩 해가 길어질 때, 땅에서는 새로운 싹들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얼었던 땅들은 조금씩 녹아 제 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조금씩 변하고 있는 베르폰과는 달리 나는 여전히 이곳에서 제자리걸음을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매일 달이 찾아오면 감기지 않는 눈꺼풀 탓에 나는 저택을 벗어난다. 아직도 가지 않은 겨울의 바람이 나를 반기며 차갑게 온도를 낮추고 수평선 너머의 해가 제 고개를 들어내기 시작하면 누군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한 발걸음으로 침실을 향했다. 베르폰의 시간을 그렇게 시작됐다.
조금씩 다가오는 초봄은 여전히 겨울만큼 추웠다. 새벽에 열린 창에서는 꽤나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왔으나, 오후쯤 열린 창에서는 뭉툭히 부드러운 바람이 한기를 녹였다. 파릇하게 올라온 새싹에 손을 얹으면 싱그러웠다. 그 기분이 너무 좋았던 탓에 너무 오랜 시간을 밖에서 보낸 것이 독이 되었다. 2월의 이른 봄의 시작은 나의 감기와 시작했다. 밤이 되어서부터 무거워진 몸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드는 오한이 분명 감기임을 알려주었다. 살짝 달아오른 체온은 금방 가라앉을 거라 생각하며 평소와 같이 하루를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어니스트에게 인사를 건넸다. 순간의 굳은 듯한 표정으로 이마에 이마를 맞대는 네 행동에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 보았다. 분명히 걱정이 들어있는 푸른 눈이 꽤나 깊었다.
"주인님, 감기 걸린 것 같은데."
어딘가 묻어있는 걱정이 무겁게 느껴졌다. 오로지 나를 벗어날 줄 모르는 네 시선을 피했다. 분명 너는 내 시선을 따라 다시 나를 바라보겠지만 당장이라도 피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 아프지 않다며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어찌나 집요한지, 따라오는 시선을 좀처럼 피하기 힘들었다. 몸을 돌려 널 피해봤지만 너는 언제나 내 앞에, 뒤에 푸르게 함께 했다. 싫다는 눈빛으로 널 쳐다봤지만 꽤나 단호한 말투는 단단히도 귀에 박혔다.
"분명 감기라니까, 얼른 가서 누워."
걱정은 고마우나 내 앞을 가로막는 네 행동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대로 널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지만 일순 흐려지는 시야에 미간을 찌푸렸다. 캄캄해지는 앞이 가로로 기울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내 침대 위였다. 마지막 기억 속의 체온보다 훨씬 올라간듯한 열기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게 만들었다. 꽤나 높은 열 탓인지 기억이 흐렸다. 분명히 옆에 네가 있는 듯한데,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게 가끔 잠에서 깨면 차가운 물수건이 나의 이마 위에 얹어져 있고 내 손을 잡은 네 손 모양이 느껴졌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잡힌 네 손을 놓지 않으려 최대한의 힘으로 붙잡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전히 떨어지지 않은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새벽 즈음 떠진 눈이 창 밖의 하늘을 향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두운 하늘이었지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것이 보였다. 보이지 않는 네 모습에 잠시 아쉬운 기분이 들었으나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이불을 가득 감싸안았다. 창가로 몸을 옮겨 창을 열자, 틈 사이로 차가운 공기들이 흘러들어와 열기를 식혔다. 차가운 바람이 한껏 내 피부를 간지럽히는 기분이 산뜻했다. 시선을 돌린 그 끝은 애매하게 누워 자는 네 모습이었다. 오늘도 너는 내 곁을 지켰구나. 좀처럼 무거운 몸은 네게 기어가도록 했다. 바짝 붙어 누운 네 등에서는 먼지 냄새와 함께 바다향이 섞여있었다. 점점 베르폰의 향으로 덮이고 있는 네 체향은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바람만 불어오는 소리 위로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얹혔다. 하루 종일 잠만 잤으면서 네 심장 소리에 또다시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내 사람, 내 저택에 찾아온 내 것. 네 허리에 팔을 감아 단단히 안고 완전히 고개를 파묻었다. 시원한 바람과 심장 소리는 완벽한 자장가였다.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을 잤다. 잠에 취해 기억이 흐릿하면서도 편안했다. 이마에 닿는 무언가의 손길에 한 번 옅게 잠에서 깼다. 불어오는 바람과 제 머리카락에 닿는 손길에 슬쩍 눈을 떴다. 자연스레 눈은 너를 찾아냈고 몸을 돌려 기지개를 켰다. 눈을 감았다가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꽤 깊게 잔 탓인지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며칠 앓았으니 그 이유도 있겠거니 생각하며 신경쓰지 않았다. 빤히 널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지만 얼굴에 지어진 표정은 그냥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 위에서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아침 인사가 원래 이렇게도 간지러웠던가. 내밀어진 손을 보고 가볍게 웃음 지으며 맞잡았다. 단단히도 붙잡는 손이 나를 끌어당기기에 몸을 일으켜 품에 안길 때 어지러움이 밀려왔다. 휘청이지는 않았으나 네게 기대 목 얹저리에 고개를 파묻었다. 편안한 품이, 온기가 좋았다.
"어지러워."
내가 말하기도 전에 너는 이미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떨어지지 않도록, 네 품에 쏙 들어간 나는 마치 어리광쟁이가 된 것마냥 네 품에 머리를 문질렀다. 내 머리 위로 얹어진 내 머리와 동시에 너는 더 가까이 나를 끌어안았다. 더 끌어안지도 못할 텐데 되는 만큼 끌어당겼다. 제 머리에 볼을 비비는 너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열은 내렸으니까 곧 괜찮아질 거야. 배고프진 않고?"
조용히 말하는 네 목소리에 조금의 어리광을 부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에 힘을 풀고 완전히 네게 기대 침대마냥 안겨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의 햇빛이 따스했다. 새소리들이 가까이서 들리고 어니스트의 심장과 함께 향연을 이룬다. 나는 작은 소리로 네게 말했다. 웅얼거린 탓에 네게 말이 전해졌을지는 몰라도 수고했다고 웅얼거렸다.
분명 이 앓음을 끝으로 아프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두어 차례 더 앓았다. 얕게 아픈 날도 있었지만 이틀 정도 누웠던 날도 있었다. 환절기가 끝나가고 완전한 봄이 찾아올 무렵,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유독 아팠던 봄의 시작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날씨는 아주 좋았지만 점점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 베르폰에서 내가.
봄은 빠르게 지나가고 녹음이 우거진 여름이 찾아왔다. 새순이 올라왔던 풀들은 어느새 무성히도 자라서 파릇하게 자라고 있었고 영지 뒷 편의 몇몇 나무들은 열매를 맺고 햇빛을 가리는 그늘을 만들어냈다. 오늘따라 건조하게 맑은 하늘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 밖으로 나왔다. 싱그러운 여름의 향이 가득했다. 나무 그늘 아래 얌전히 시간을 즐기고 있으니 멀리서 어니스트가 걸어왔다. 부는 바람에 옷이 흩날리고 그의 속살이 보이지만 내 상관은 아니었다. 눈을 쳐다보며 같이 웃었고, 어니스트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서늘한 나무 그늘 아래에 우리는 가까이 붙어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자꾸만 목과 뺨을 감싸 불편했다.
머리를 묶은 널 슬쩍 보고는 몸을 돌려 네게 등을 보였다.
"어니언, 머리 묶어줘."
얌전히 바다를 바라보며 묶어주기를 기다렸다. 넌 자연스레 내 머리카락을 모았다. 덮고 있던 목선이 드러나서 잠시 시원한 바람이 쓸고 지나가자 한기가 드는 듯했다. 얌전히 기다리며 네 손길을 받고 있었다. 조이지는 않았으나 느슨하지도 않게 묶인 머리카락이 한껏 뿌듯해진 기분으로 몸을 돌리려던 찰나, 뒷덜미에 닿는 말캉한 기분에 멈칫했다. 진하게 다가온 입술에 목덜미에 분명히 자국이 남았음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 네 손길에 같이 손을 뻗어 자국을 만졌다. 선명히도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 확실했다. 금방 지워질 각인이 새겨졌다. 몸을 돌려 널 빤히 쳐다보자, 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키스하고 싶었어. 입술은 다음에."
키스하고 싶었다면 그냥 말했으면 좋았을걸. 싫다고 날 밀어낼때까지 입술을 저밀 수도 있는데. 아무 말도 않고 네 얼굴만을 빤히 바라보며 속내를 삼켰다. 고개를 내저으며 네 곁에 가까이 붙어 바닷가를 바라봤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덕분에 바다는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찰랑이는 물결이 그날따라 예뻤다. 수평선 너머로 하늘과 바다가 하나 되는 듯 이어져 있었다. 문득 그 너머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끝으로 건너가, 푹 잠긴다면 정말 심연일 텐데. 기대 있던 허리를 세우고 기지개를 켰다. 신고 있던 신발을 느릿하게 벗어 나무에 기대 놓고는 네게 손을 내밀었다.
"바다 들어가자."
간결하게 네게 말하고는 신고 있는 신발을 턱짓했다. 넌 분명 거절하지 않을테니 어서 신발을 벗으라고 재촉하듯 쳐다봤다.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벗어던졌다. 입고 있는 바짓단을 접어 올리고는 내민 손을 맞잡았다. 나무 그늘 아래를 벗어나 모래사장으로 향하는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발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뜨거운 모래가 따가웠다. 잡은 손을 좀 더 단단히 잡고 널 앞서 질러 걸어갔다. 차가운 파도 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리고 발 끝에 차가운 바닷물이 닿을 때 시원한 감이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왔다. 나란히 발을 담그는 네 모습에 모든 것을 잊고 신나게 놀았다. 걷어올린 바짓단은 이미 다 젖었고 상의 끝은 이미 축축했다. 어린아이처럼 놀다가 잡고 있던 네 손을 놓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달라지는 수온이 점점 피부를 감싸 안고 무겁게 체온을 떨어트린다.
"어니언, 여기까지 와볼래? 그렇게 깊지 않아."
네게 손을 내밀며 이리오라고 손을 뻗었다. 어니언, 너는 나를 위해 어디까지 올 수 있을까. 내가 죽어서도 너는 따라오려나. 뻗은 손을 잡으려 다가오는 널 시험하듯 뒤로 조금씩 들어갔다. 점점 더 깊게 들어간 바닷물에 삼켜질듯 내 폐를 짓눌렀다. 발 끝은 이미 모래 속 깊숙히 빨리 들어가고 있었기에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쓰러질 듯했다. 너는 자리에 멈춰 서서 가지 말라는 따끔한 일침을 했고 나는 멈춰 섰다.
"어니언, 나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이야. 수영 정도는 할 수 있고."
그래서 나는 이 서늘한 바다가 익숙해.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자 폐를 짓누르던 물들은 나를 감싸 안았다. 누군가 나를 안고 있는 듯한 편안함은 더 오래 물속에 빠지도록 유혹했다. 순간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네 얼굴이 떠올라 멀지 않은 곳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네게 얘기하고 다가오는 널 바라보고 있을 때 저릿하는 느낌과 함께 휘청였다. 다른 발을 딛기도 전에 균형이 무너졌다. 그대로 바닷속으로 다시 들어간 나는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없었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 탓인지 몸에는 힘이 들어갔고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물 너머로 보이는 햇빛이 일렁이며 시야를 가득 채웠다. 아름답기도 하지. 귓가에 첨벙이는 소리와 함께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올렸다. 죽음까지 따라오네? 아플 정도로 강하게 잡은 팔을 끌고 얕은 곳까지 끌려 나왔다. 아직도 말을 듣지 않는 다리 탓에 잠시 휘청이다가 네게 기댔다. 올려다본 네 눈에서는 바닷물 일지 모르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너는 언성을 높였다.
"넬! 지금 뭐하는거야!"
놓지 않을 거라는 듯 강하게 붙잡고 나를 쳐다보는 네 눈을 마주 보았다. 일말의 절망을 맛본 듯했고, 정말로 나를 살리기 위해 그 깊은 곳에 몸을 디뎠다. 너는 그 어디라도 날 따라올 수 있을 사람이었다. 지어지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이 곳에 살아 숨 쉬고 있으며 네게 기대 온기를 느끼고 있으니까. 죽지 않았다. 아니, 죽지 못했다. 부드러운 손길로 네 볼을 감싸 눈물로 보이는 물방울을 닦았다. 누가 나를 위해 울까. 아마 너 말고는 없을텐데.
"어니언, 키스해줘."
나를 담고 있는 네 눈을 빤히 쳐다봤다. 푸르게 빛나는 네 눈은 나로 가득 차 있다. 나를 향한 눈물, 나를 향한 시선, 나를 향한 걱정, 내가 만들어낸 절망, 내가 채운 목줄. 널 욕심내고 네게 집착하고 너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다면 나는 나 자신으로서의 또 다른 공식을 세울 수 있을 걸까. 네 수식이 포함된 공식을. 어서 해달라는 듯 나는 너를 바라봤다. 잠시 눈을 맞추던 너는 그에 응해 내 입술을 삼켰다. 살짝 미소가 지어졌고 나는 눈을 감았다. 얽히는 입술이 더욱 잘 느껴졌고, 흐르는 눈물이 입술 사이로 들어와 밍밍하게 느껴졌다. 탐하는 듯한 우리의 키스는 그 이상으로 얽혔다. 나를 위해 죽음까지 달려드는 너는 이상의 존재로 자리 잡는다. 얼마나 더 깊이 날 잡으러 들어올 수 있을까. 부드럽게 네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울고 있는 네 얼굴을 내려 눈에 짧게 입을 맞추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까이 붙어있는 탓에 심장 소리가 너무 잘 들렸다. 누가 이리도 뛰고 있는걸까.
"넬, 그러지 마."
애절하게 나를 향한 눈빛에 나는 네 두 뺨을 감싸고 다시 한 번의 키스를 했다. 죽지 않고 이 곳에서 너와 함께 살아있는데 무슨 걱정일까 너는. 손을 뻗어 네 머리를 쓰다듬었고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안심은 널 숨쉬게 할테니까.
"입술에 하는 키스에 다음을 기약하지마."
그 다음이 없을 수 있으니까.
내가 그 키스로 살아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부디 망설이지 말고 그 입술로 나를 탐해봐.
그만큼 나도 널 잡아먹을테니 우리의 여름을 그렇게 시작해보자. 죽지 못한 생명으로, 우리의 욕심으로.
시작된 우리의 여름은 풋풋했다. 맞이하지 못한 죽음 이후 키스는 다음을 기약하지 않았다. 원할 때 서로의 입술을 겹쳤고 우리는 서로에게 응했다. 그 키스에 의미가 있든 없든 맞닿은 입술은 꽤나 길게 지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글쎄, 이게 사랑인가. 내가 어니스트를 찾는 일은 잦아졌고 우리가 붙어있는 시간은 늘어났다. 그의 온기가 너무나도 은은해서 놓치고 싶지 않았던걸지도 모른다.
"주인님, 오늘부터 비 온다던데 설마 새벽에 또 나갈 생각은 아니죠?"
벌써 장마철이던가. 늦은 아침을 먹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내다봤다. 분명 하늘은 맑은데 수평선 근처의 하늘을 꽤나 칙칙한 것이 눈에 띄었다. 저 속도라면 분명 오후쯤부터 비가 내리지 않을까 추측하며 오늘은 더 일찍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써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식사를 마저 했다.
"집에만 박혀있으라는 소리라면 듣고 싶지 않은데."
대충 배가 부르기 시작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앞에 우뚝 서서 널 올려다보며 말했다. 고개를 기울이며 네게 안되냐는 눈빛을 보냈지만 너는 꽤나 단호한 말투로 나가지 말라고 말했다. 바다에 빠졌던 이후로 유독 과보호하는 느낌이 있지만 네게 대답 대신 짧은 키스를 남기고 지나갔다. 그 의미는 아마 알지 않을까 믿으며.
약간의 시간을 보내고 창틀로 향했다. 밖에 나가려면 들킬테니까, 창틀을 밟고 지붕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가뿐하게 창틀에 올라서서 팔을 뻗었고 지붕에 올라갔을 때 내리쬐는 해가 아주 포근했다. 어딘가에 그늘이라도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자켓을 벗어 덮는 것으로 대신했다. 따듯한 지붕은 시간을 보내기에 제격이었다. 조금 더운감도 있었으나 추운 것보다는 나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그 시간을 즐겼다. 피부에 내려앉는 서늘한 기분에 밍기적 몸을 일으키자 언제 왔는지 먹구름이 머리 위에 가득했다. 비가 오면 분명 내려가기 힘들텐데. 생각하며 서둘러 일어서자 번쩍하며 번개가 쳤다. 움찔하고 자리에 굳었고, 후에 바로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천둥과 동시에 강한 비가 내렸다. 조심스레 지붕에서 내려오니 이미 옷들이 전부 축축했다. 순식간에 불어오는 바람에 한기에 몸이 떨렸다. 걱정하고 있을 어니스트를 찾아 복도로 나오자마자 널 마주쳤다. 뚝뚝 떨어지는 물을 짜내며 너를 바라봤다.
"집에서 나가지 말라 그래서 건물 지붕에 올라가 있었던 것뿐이야."
굳어있는 네 표정을 보고 변명을 댔다. 분명 걱정했을테니까. 잘못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딱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올라가고 싶었고 너는 나한테 크게 꾸짖지 못할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비 맞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던 건데, 추위도 많이 타면서 그러고 싶을까."
손에 들고 있던 겉옷을 빼앗겼다. 곧바로 붙잡힌 손에 당황하진 않았지만 너를 빤히 올려다보고 저항없이 따라갔다. 분명 걱정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으니까. 떨어진 체온 탓에 떨리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욕실에 도착할 때쯤 떨림은 멈췄지만 체온은 싸늘했다. 욕실에 도착한 너는 내 손을 놓고 무작정 뜨거운 물부터 틀었다. 내 앞을 부지런하게 돌아다니며 목욕 준비를 하던 네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닫지 않은 창문이 떠올랐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아직 컴컴한 것을 보니 분명 열어놓은 창으로 빗물이 전부 들어왔을테지. 부지런히 움직이는 네 행동을 보고 지금이라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준비하는 동안 닫고 오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준비하는 네 모습을 뒤로 욕실 문을 열었다. 열린 문 틈 사이로 들어온 공기가 꽤나 차가웠다. 발을 한걸음 밖으로 내딛으려 발을 옮기는 순간 팔이 잡혀 돌려세워졌다. 자연스레 젖은 내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기 시작할 때 저항없이 네게 말했다.
"어니언, 나 방 창문 열어두고 왔는데 안 닫아도 되는 걸까."
내 단추를 풀던 네 손은 멈추고, 동그랗게 눈을 뜨는걸 보고 웃음이 나올 뻔 했다. 빤히 나를 바라보다가 욕실을 나서는 네 뒤를 한 박자 늦게 따라갔다. 도착한 내 방은 역시나 이미 빗물로 가득했다. 한숨을 내쉬는 네 모습에 조금은 꾸짖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너는 말없이 열린 창문을 닫았다. 창문을 닫은 네게 다가가 손을 붙잡고 욕실로 돌아갔다. 따뜻한 수증기가 욕실을 가득 메우고 나는 네게 시선을 고정시킨채 옷을 벗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찰박거리는 물소리만 울려퍼졌다. 평소와 달리 아무말도 오가지 않았고, 어쩐지 네 눈치가 보였다. 고개를 젖혀 널 빤히 바라보다 다가온 팔을 잡았다. 따뜻한 물 덕분에 같은 체온으로 올라온 네 팔에 얼굴을 맞대고 손을 뻗어 네 뺨을 문질렀다. 점점 빨개지는 네 뺨에 장난기가 돋았다. 잡고 있던 팔에 키스를 했다. 자국이 남지 않을만큼 네 손바닥에 한 번, 손가락에 한 번 짧은 키스를 남기고 마지막으로 네 손가락을 살짝 깨물며 널 올려다봤다. 잔뜩 빨개진 시야의 끝은 분명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대에 가려져 내 모습은 보이지 않을테지만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없이 나는 네 팔을 잡아당겼다. 쓰고 있던 안대가 조금 거슬렸을지도 모르지만. 그 탓에 네 안대가 살짝 벗겨지려 했지만 너는 급하게 안대를 붙잡아 시야를 가렸다.
"넬!"
다급히 내 이름을 부르는 네 목소리에 웃음이 나왔다. 고작 안대 하나 벗겨진다고 다급해질 이유는 없을텐데.
찰박거리며 네게 다가가 안대 위로 또 한 번의 키스를 남겼다. 꽤나 가까워진 우리 사이에 나는 널 빤히 바라보다 귓가에 속삭였다.
"어니언, 키스해줘."
네 안대에 손을 올렸지만 그 안대를 벗겨내면 도망이라도 칠 것 같아서 벗기지 못했다. 아주 빨갛게 달아오른 네 얼굴을 보자마자 달아나려 하길래 네 팔을 강하게 붙잡아 품에 안았다. 그대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정적이 흐르기에 네 팔을 놓고 자세를 고쳐앉았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나란히 앉아 조용히 정적을 지키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갑게 식었던 몸은 따뜻해졌고, 축축했던 기분은 뽀송해졌다. 한껏 노곤해진 나는 나란히 네 방으로 향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비는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걷는 도중 두어번 정도 친 번개가 어두운 복도를 밝혔다.
도착한 네 방 앞에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네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분명 같은 베르폰이었는데 이 공간에는 너로 가득차 있는 탓인지 베르폰이 아닌 느낌이었다. 향부터 분위기까지 전부 '어니스트'의 방이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뚝뚝 물이 떨어지고 너는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금세 타오른 불 덕분에 방 안 가득 나무 타는 소리와 비소리가 겹쳐졌고 방은 아주 고요했다.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자 너는 내 머리카락을 말렸다. 부드럽게 매만지는 손길 탓인지 목욕을 한 탓인지 아주 나른해지는 기분에 나는 그대로 몸을 젖혀 네 품에 들어갔다. 빤히 올려다보는 시선에 서로 눈이 맞았지만 너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내 허리를 감았을 뿐이었다. 조용히 내 허리를 감은 네 손을 잡고 꼼지락거리는 장난을 반복하다 잠이 오는 기분에 눈을 감았다. 편안하게 누워있던 그 때 네가 나를 들어안고 침대로 향했다. 왠지 다른 곳으로 가버릴 것만 같은 기분에 네 옷깃을 붙잡았다. 살짝 뜬 눈 사이로 네 눈이 보이고 빤히 서로를 마주봤다. 내 속내를 알아챈건지, 그냥 하고 싶어서 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너는 네게 다가와 입술을 벌렸다. 맞닿는 입술에 네게 욕심이라도 부리듯 고개를 들어 다가갔고 얽히는 입술은 평소보다 느긋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귓가 얹저리를 맴돌았지만 그 소리보다 크게 심장소리가 들렸다. 아주 빨리 뛰는 심장소리에 점점 귀가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길게 입술을 맞대다 떨어진 우리의 시선은 맞추기라도 한 것인지 동시에 시선을 피했다. 다시 마주본 시선에서 빨개진 네 얼굴을 보자, 서로가 부끄러워했다는 걸 깨닫고 웃음이 터졌다. 어딘가 묘하게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고 나란히 누운 침대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를 바랬다. 이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기억되기를 빌었다.
간 밤에 내리던 비는 새벽에 그쳤다. 하늘에 가득했던 먹구름이 개어 파랗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고, 지저귀는 새소리에 이그넬은 눈을 떴다. 가볍게 아침을 시작했고 제 옆에 누운 어니언을 보며 미소지었다. 평생 모를 줄 알았던 사람의 온기를 알고나니 더욱 욕심이 났다. 어니스트 리 카터. 나의 저택에 찾아온 한 마리의 박새. 새 한 마리가 가져온 온기가 이리도 따뜻할지 몰랐었다.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 없을만큼 그의 품이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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