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맺지 못한 이그넬의 죽음과 누군가의 사랑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여름은 풋풋했다. 죽음 이후 이어졌던 키스는 더 이상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서로의 입술에 맞닿았다. 누구의 입술이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응했다. 의미가 있든 없든 맞닿은 입술은 먼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제 3자는 필시 사랑하고 있노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그넬은 어니스트는 찾는 일이 잦아졌고, 서로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제 막 더위가 시작했건만 멀어질 줄 모르는 두 사람의 틈은 겹쳐지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겹쳐진 선을 찾지 못할 만큼.
"주인님, 오늘부터 비 온다던데 설마 새벽에 또 나갈 생각은 아니죠?"
조금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이그넬은 어니스트의 말에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내다봤다. 저택 가까이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게 맑았으나 바다 수평선 근처에서 칙칙한 구름들이 꽤 느리지 않은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저 너머에는 비가 내리고 있는 것처럼 멀리서도 번개가 치는 것이 보였다. 이그넬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식사를 마치고 말했다.
"집에만 박혀있으라는 소리라면 듣고 싶지 않은데."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니스트의 앞에 선 이그넬은 똑바로 올려다보며 그에게 말했다. 기울어지는 이그넬의 고개에 어니스트는 꽤나 단호한 말투로 다시금 말했다. 나가지 말라고. 어느 종이 주인에게 그렇게 말하겠느냐만, 바다에 빠졌던 이후 꽤나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미묘하게 얽힌 이그넬은 대답 대신 그의 볼에 짧게 키스를 남기고 지나갔다. 어니스트는 이그넬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그 날의 하루는 서로 마주치는 일 없이 조용히 흘러갔다.
이그넬은 점심을 거르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것인지 저택 내에는 이미 없는 것 같았다. 어니스트는 서둘러 그를 찾으려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늦은 오후가 되도록 이그넬은 보이지 않았다. 점점 하늘이 어두워지며 먹구름이 몰려왔다. 공기 중의 무게가 무거워지고 습해지기 시작하자 번쩍하며 번개가 쳤다. 멈칫하는 어니스트의 귀로 바로 쿠르릉하는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세차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을 때리는 강한 빗소리가 어니스트를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까보다 더 빨라진 발걸음으로 어니스트는 이그넬을 찾기 시작했다.
조금씩 비들이 축축히 저택을 감싸 안을 때 이그넬은 축축해진 채 어니스트의 앞에 나타났다. 축축이 젖은 이그넬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물을 짜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태도를 보였고 추운 듯 몸을 떨고 있었다. 벗지 않은 옷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복도 한가운데에 물 웅덩이를 만들고 어니스트의 굳은 표정에도 이그넬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집에서 나가지 말라 그래서 건물 지붕에 올라가 있었던 것뿐이야."
변명 같은 이유를 대며 이그넬은 어니스트의 앞에 다가왔다. 빠안히 올려다보며 어리광을 부리는 듯 그의 팔을 잡았다. 그가 걱정했음을 이그넬은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행동에 후회하지 않는 듯했다. 어니스트는 한숨을 내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그넬에게 말했다.
"비 맞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던 건데, 추위도 많이 타면서 그러고 싶을까."
어니스트는 이그넬의 손에서 축축히 늘어진 겉옷을 빼앗아 들고는 손을 잡아끌었다. 이그넬은 저항 없이 그의 걸음을 따라 뒷모습을 바라보며 걸었다. 떨리던 손이 맞잡은 손에 떨림을 멈추었지만 물기 탓에 떨어진 체온은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이그넬의 손을 잡고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욕실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욕실에 무작정 뜨거운 물부터 트는 어니스트의 손길은 급했다. 멀뚱대던 이그넬은 잠시 그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아무 기척 없이 욕실 문을 열었다. 그 몰래 나가려는 건지 이그넬이 욕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어니스트가 그의 팔을 잡았다. 이그넬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고는 셔츠의 첫 번째 단추부터 풀어 내리기 시작할 때 이그넬은 저항 없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어니언, 나 방 창문 열어두고 왔는데 안 닫아도 되는 걸까."
이그넬의 말에 멈칫하며 어니스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덩그러니 이그넬을 남겨두고 욕실을 나서고 이그넬은 한 박자 늦게 그의 뒤를 따라 제 방으로 향했다. 이미 빗물로 가득 들어차서 이불부터 바닥까지 전부 축축했다. 어니스트는 한 숨을 내쉬고 이그넬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창문을 닫았지만 축축해진 방에서는 오늘 밤을 보낼 수 없었다. 일단 두 사람은 시작하지도 못한 목욕을 마치기 위해 욕실로 돌아갔다. 이그넬의 떨림은 조금 멎었지만 몸은 굉장히 차가웠다. 이그넬은 옷을 벗고 어니스트는 안대로 제 눈을 가렸다. 따뜻한 수증기가 잔뜩 욕실을 메우고 이그넬의 시선은 어니스트에게 고정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만 가득한 욕실에서 무언가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고 이그넬은 그 분위기를 깨며 제 몸을 씻기던 어니스트의 팔을 잡았다. 살짝 끌어당겨 그의 팔에 얼굴을 부비고 뻗은 손은 어니스트의 뺨에 닿아 천천히 문질렀다. 조금씩 빨개지는 어니스트의 뺨에 이그넬은 부비던 팔에 키스를 했다. 꽤나 집요하게 만지다 손바닥에 한 번, 손가락에 한 번 짧게 입술을 맞대고 손가락을 살짝 깨물어 어니스트를 올려다본다. 분명히 시선은 이그넬을 향하고 있으나 안대 탓에 보이지 않음을 이그넬은 알고 있었다. 조금의 심술이 난 건지 이그넬은 잡고 있던 팔을 그대로 당겨 어니스트를 물에 빠트렸다. 어니스트는 살짝 벗겨지려 하는 안대를 급하게 붙잡아 시야를 가리고 놀란 듯 말했다.
"넬!"
이그넬이 푸흡하고 웃는 소리를 내며 안대 위로 또 한 번의 키스를 남겼다.
어리광을 부리듯 이그넬은 어니스트를 잡아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어니언, 키스해줘."
이그넬은 안대를 향해 손을 뻗지만 안대 너머로 네 눈을 만져볼 뿐 안대를 벗기지는 않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니스트는 이그넬을 피해 도망치려 하지만 이그넬은 바로 팔을 품에 안아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챘다. 둘은 서로 아무 말도 않고 정적을 지키다 이그넬이 먼저 입술을 꾹 누르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작 입술에 키스를 하지 않았으나 어니스트가 도망갈 바에 잠시라도 있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함이 분명했다. 어니스트는 경직된 자세로 나란히 앉아있다가 이그넬이 먼저 일어나며 목욕을 끝냈다. 뽀송뽀송하게 목욕을 마친 두 사람은 나란히 어니스트의 방으로 향하며 창 밖을 구경했다. 세차게 내리는 비는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번쩍이는 번개는 가끔 어두운 복도를 밝혔다.
어니스트가 제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그넬은 그 뒤를 따라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에서는 뚝뚝 물이 떨어지고 있었기에 어니스트는 벽난로에 불을 먼저 지폈다. 나무 타는 소리와 비 내리는 소리가 겹쳐서 고요함이 방을 메울 때 이그넬의 머리에 손을 얹어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 거의 다 말려갈 때쯤 이그넬은 몸을 뒤로 젖혀 그대로 어니스트의 품에 들어갔고, 어니스트는 그대로 허리를 감아 서로 벽난로 앞에 앉은 격이 되어버렸다. 이그넬은 오늘따라 어니스트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정적이 다시금 찾아왔다. 이그넬은 어니스트의 손을 꼼지락대며 장난을 반복하다 손을 맞잡고 그에게 완전히 기대, 눈을 감았다.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는지 어니스트는 이그넬을 안아 들어 침대로 향했다. 역시나 이그넬은 잠에서 잠시 깨어 어니스트를 붙잡았다. 어니스트는 이그넬을 내려다보며 빤히 서로의 눈을 쳐다보고 이그넬에게 다가가 오늘 하루의 마지막 입술을 벌렸다. 닿는 입술에 이그넬은 고개를 들어 어니스트에게 다가갔다. 얽히는 입술은 평소와 달리 느릿했고, 빗소리에 묻혀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어니스트의 얼굴과 이그넬의 귀는 같이 빨개지고 떨어진 후에 마주친 눈에 서로 동시에 시선을 피했다 다시 마주 봤다. 이그넬이 먼저 웃음을 터트리고 어니스트는 부끄러워했다. 간지러운 밤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고 드물게도 이그넬은 깊은 잠을 잤다.
간 밤에 내리던 비는 새벽에 그쳤다. 하늘에 가득했던 먹구름이 개어 파랗게 얼굴을 내밀고 있었고, 지저귀는 새소리에 이그넬은 눈을 떴다. 가볍게 아침을 시작했고 제 옆에 누운 어니언을 보며 미소지었다. 평생 모를 줄 알았던 사람의 온기를 알고나니 더욱 욕심이 났다. 어니스트 리 카터. 나의 저택에 찾아온 한 마리의 박새. 새 한 마리가 가져온 온기가 이리도 따뜻할지 몰랐었다.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 없을만큼 그의 품이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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