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너와 나는 알고 있는 현실에 조금 부정을 하고 있음이 같았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것은 너는 조금 더 자신을 내비치고 있었고 나는 그 속 안에 자신을 더욱이 감추고 있다는 것이 유일히 다른 점이었으리라.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 사이에는 누군가의 죽음이, 너의 슬픔이 모두 베여 폐에 각인처럼 새겨질 것이다. 언젠가 무뎌질 상처들일테지만 우리는 결코 그들의 죽음을 잊지 않으리.
"그래. 우리의 현실은 그런거야. 그러니 너무 큰 기대를 품지말고, 너무 오래 그 슬픔을 유지하지말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슬픔에 삼켜지는 것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을테니까."
정말 모순된다. 나는 이미 삼켜져있으면서.
인간들은 자신의 아픔을, 상대의 고통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이용하거나 무시한다. 나의 앞 길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니까. 서로를 의지하며 나아가지만 어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를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네 말처럼 우리들은 결과를 보고 더 나은 선택지를 찾아낸다. 그러나 과거는 되짚어 돌아갈 수 없으니, 우리는 희망이라는 같잖은 허상을 잡고 결정에 대한 후회를 번복한다. '가정'은 결과를 보기 전에 붙잡는 또 다른 허상에 불과하다.
"내가 한 선택에 후회를 하는건 우리 모두가 하지만, 결국 인정하고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는 그들과 같이 과거에 얽매여서는 안돼."
지금의 우리에게 정말 잔인한 말이다. 한참 나약한 인간들은 정말 바닷가의 모래성 같아서 작은 바람에, 파도에 쉽게 휩쓸려간다. 누군가는 그 파도를 타고 다른 곳에 당도할테고, 어느 누군가는 다시는 육지로 올라오지 못하게 심해의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두 갈래의 길 중 어느 길로 가라앉을까. 서로에게 너무나도 애절히 기대고 있는 현재의 우리들은 술기운에 뇌를 거치지 않고 내뱉는 말들이 아주 지저분하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하는 단어들이 마구잡이로 귀를 타고 들어옴에도 나는 모든 말들을 알아 들었다. 그 속에는 처절한 슬픔들이 가득 담겨있으니.
"하지만, 우리는 다짐을 할뿐 확신을 하지 않잖아. 미래의 일어나는 일따위 우리가 전부 알 수 있는게 아니잖아. ....지금의 우리는 '내일은 나를 잃지말자'라는 다짐을 해야지. 서로를 잃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잃지 말아야지."
과연 이게 네게 해줄 말이 맞는걸까.
"모든 일에 익숙해지면, 전부 반복된 일들이 끝맺음을 하고 나면 네 곁에는 누군가가 남겠지. 그게 내가 아니더라고."
그렇지만, 푸시에. 나는. 이미 내 곁에는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아. 나는 내 품은 내어줄 수 있지만 도려진 내 심장을 드러낼 수는 없어. 그렇지만 나는 또 누군가를 잃는 것이 두려워진다. 이미 무뎌져 익숙해졌음을 느꼈지만 매번 예기치 못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를 더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지옥이다. 과연 그 끝에는 누가 네 곁을 지키고 있을까. 꽤나 단단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레 환상을 품는다.
"...모두가 소중한 사람을 잃었고, 목숨을 앗아갔어. 우리들은 아직 더 많은 것을 잃어야하고, 이 반복은 끝날 때가 되지않았어. ...기준따위. 필요없을거야."
감기는 두 눈 사이로 스며든 눈물이 내 어깨까지 맞닿을 때, 나는 또 다른 절망을 맞이한다. 미약하나 분명히 자신을 드러내는 작은 절망. ...너는 나를 나락으로 끌어내릴 생각일까. 단단히 너를 붙잡고 있는 내 팔은 허상에 불과할 나의 진심인데.
"...지금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네 눈물이 스며든 어깨에서 너를 떼어냈다. 눈물로 가득한 네 얼굴을 마주하고 나는 일그러진 표정을 지어보인다. 도대체 무슨 말에 더, 어떤 칼날에 더 저며들어야하는거야.
"이 혼란이 없어지지 않을 거 알고 있잖아. ...그런 생각 나한테 말하지마. ...그렇게 나를..."
더 고독으로 밀어넣지마.
끝맺음을 하지 못한 나의 끝 말은 더없는 어둠으로 숨겨져 차갑게 방치된다. 이 어둠은 나의 길이다. 육지로 올라가지 못하고 심연으로 가라앉는 모래알이 바로 나다. 다시는 햇빛을 보지못할 영원한 어둠.
"지금은 잠들어도 돼. 내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을거야. ...죽음에 익숙해지는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니까. 이제 고작 짧은 순간의 시간을 건너온거야. ....체벌일리가 없잖아. 우리 모두는 다른 이의 죽음으로 죄값을 치룰 수 없어."
고작 눈물에 젖은 눈은 다시는 뜰 수 없을만큼의 무게로 짓누르지만 눈물은 증발하여 또다시 눈을 뜨게 만들 것이다. 오늘의 해가 뜨면 내일의 달이 찾아오듯, 우리는 행복과 절망을 반복할 것이다. ...고작 키스따위가 떨어지는 너를 잡을 수 있을까.
강하게 붙잡고 있던 나의 팔은 힘을 풀어 네 눈과 마주한다. 나와 반대되는 색을 가진 네 파란눈은 내 붉은 눈과 섞이지 않고 유일하게 빛난다. 부디, 그 색으로 끝없이 빛나기를. 네 눈을 내 눈에 담고 영원히 잊지않을것이라 의미없는 다짐을 한다. 무너졌다면 무너졌을 너를, 손가락 사이로 새어흐르는 모래를 붙잡고 짧은 입맞춤을 네 입술에 새긴다. 영원히 죽음을, 이 밤을 잊지못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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