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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넬 E. 베르폰

한 마리의 새가 가져온 온기가

하늘에 가득 채운 구름들이 날씨를 탁하게 만들고, 불어오는 파도들이 또다시 저택을 강하게 내리쳐 창틀이 흔들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반복된 하루였고, 그 누구도 곁에 없는 저택이었다. 그 일이 끝난 이후, 밀렸던 일들을 처리하며 한껏 지쳐있을 때 나의 저택에는 한 마리의 박새가 찾아왔다. 어니스트 리 카터. 고작 짐이라고는 가방 하나를 들고 와서는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아, 예전에 분명 같이 살자고 했던가. 문을 열어젖혔다. 그가 들어오지 못할 것은 없었으니까.

 

그는 변함없이 활기차게 웃고 있었고, 언제나와 다름없이 눈이 나를 향했다. 그게 무슨 속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언젠가 그라티아가 내 저택에 찾아온 것과 같이 그는 저택 곳곳에 색깔을 넣기 시작했다. 사람이 들어오면 분위기가 바뀌는 베르폰은 알 수 없는 온기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무런 기약 없이 시작된 어니스트와 나의 관계는 정말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넬'이라는 애칭으로 나를 불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어니스트는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나는 그를 발치에 깔았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던 저택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누군가가 생겨났다.

 

어니스트 리 카터, 어니언은 매일 내 이름을 불렀고 뒤를 돌면 언제나 내 뒤에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대로 내 옆에 선 네게 나도 달라진 것 없이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 나의 어둠에, 나의 과거에 차마 남을 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의 약점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서라도 널 향한 편안함을 없애려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끝까지 내 시선을 쫓아와 시야 안에 자신을 욱여넣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닿을 거리가 아니니 나는 안심하고 그대로 두었다. 제멋대로 굴지는 않았으니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가까워지지 못할 테니까.

 

새로운 사람이 베르폰에 들어왔어도 땅거미가 짙게 깔린 밤에는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 내 곁에는 이제 아무도 없는데, 나한테 말을 건넬 이가. 아, 어니언... 침대에서 일어나 창을 열어젖혔다. 밖에 나가면 금방이라도 눈치챌 것 같은 조금의 배려였다. 눈을 감고 내 뺨을 스치는 바닷바람이 오늘따라 산뜻하다. 눈에 가려진 일말의 빛이 사라지고 파도가 나의 고막을 때려 다른 잡음들이 들리지 않으니 홀로 남겨진 지금이 조금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 누구도 내 곁에 없으니 차라리 더 나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새벽의 여명이 나의 눈꺼풀 위로 차분히 내려앉았다.

-같은 곳에 물이 고이고, 감정은 썩어가고 진실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그 누가 빛이 없음을 믿으랴, 그곳에 달이 빛나고 있는데.-

어김없이 찾아온 아침의 햇살은 전혀 따뜻하게 빛을 낼 뿐이다. 모든 빛이 따뜻하지 않으니, 나는 그곳에 달이 있음을 믿지 않는다. 더욱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에 창을 닫고 비척이며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곧 어니스트가 저 문을 열고 들어올 테니 앉아서 그를 기다린다. '이미 거두어진 커튼을 보고 그는 뭐라고 말할까.' 그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자 나는 문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제 손을 내려본다. 뻗어서 닿지 않을 손임에도 나는 무의식 중에 네게 손을 뻗은 듯했다. 고작 1년도 되지 않았는데,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으로 나는 또다시 걸어서는 안될 기대를 걸고 있음을 눈치챘다. 다른 이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알고 있으면서. 괜히 자신에게 짜증이 나서 이불을 끌어올렸다. 곧바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했다. 일어나라는 그의 소리에도 이불속에서 급한 대로 나 자신을 감추고 일어나지 않았다. 이불 너머로 느껴지는 네 손길을 차갑게도 뿌리쳤다.

 

"어니언, 나가. 조금 있다가 일어날 테니까."

 

잠시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다가 다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난다. 그대로 나는 이불속에 갇혀 조금의 시간을 보내고는 일어서서 하루를 시작했다. 해가 창을 타고 들어와, 이제는 조금씩 온기가 전해지는 게 느껴진다. 한 마리의 박새가 찾아가고 난 후의 온기, 나는 무의식 중에 곁에 네가 있는 것이 익숙해진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만큼 사람의 온기가 익숙해진다.

 

옷을 갈아입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역시나 휑한 복도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발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조심스레 걸어 베르폰을 빠져나갔다. 오늘은 이 곳에 발을 디디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피비의 뼈가 파고든 자리를 찾아갔다. 작은 풀들이 자라 흙은 판 자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사라질 때쯤 나는 또 기억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 슬픔은 결국 나의 발목을 잡아 아래로 끌어내릴 테니까. 그러니까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지금은 좀 더 기억해도 괜찮을 것이다. 새벽녘의 이슬이 채 가지 않아 땅이 축축하지만 나는 그 위에 스스럼없이 눕는다. 나도 아마 죽어갈 때쯤 이 곳에 누워 그들의 하루치 밥이 될 것이고 뼈만을 남긴 채 이 곳에 가라앉을 테니까.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자리이다. 눈을 감으면 주변의 소리가 선명히도 들려온다. 파도는 이명처럼 익숙히 나의 귀를 때리고 새들의 울음소리, 날갯짓은 변함이 없다. 잠들지 못했던 탓에 나는 금방 나른해진다. 그늘 아래에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정말 환상의 자장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어느 때보다 나른하게 잠에 빠진다. 깊이 잠에 빠지지는 않지만, 어느 때보다 편안함을 느낀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피부에 햇빛이 닿아 조금 뜨거워짐을 느꼈다. 피부가 살짝 탔으려나. 어기 적하며 일어나 흙을 털어내고 베르폰으로 들어간다. 평소 같았으면 돌아가 금방이라도 일을 시작했겠지만 하루 종일 없었으니 네게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주려 널 찾는다. 어디 있는 거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결국 저녁을 기다리기로 했다. 가만히 있어도 날 찾아올 테니. 시간이 흐르기 전까지 간단한 업무들을 처리한다. 역시나 저녁이 되자 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보던 업무를 내리고 네가 들어올 문을 바라본다. 열리는 문 사이로 보이는 네 얼굴에 같이 웃으며 나간다. 평소와 다름없던 하루는 어니스트의 부름으로 마지막을 달리기 시작한다. 다시 밤, 땅거미가 짙게 깔리는 시간이 되자 방으로 들어간다. 오늘따라 품에 안았던 모든 사람들의 온기가 그리우나 이불을 끌어안고 온기를 대신한다.


아침이 찾아온 것을 알았지만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따뜻한 체온으로 떠나지 않은 열기가 이불 안에 갇혀있는 기분이 좋았다. 조금 더 뒹굴거리며 다시 잠이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곧 문이 열리고 네가 들어왔다. 커튼을 걷어내자 들어오는 햇살이 꽤나 눈부셨다. 눈꺼풀 위로도 느껴지는 빛이 너무나도 밝아서, 네 형체만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아.

 

"일어나 주세요. 주인님, 아침이에요."

 

이제는 익숙한 아침을 알리는 네 목소리. 들어오는 빛을 눈으로 가려보나, 손가락 사이로도 빛이 들어온다. 네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볼에 무언가 가볍게 닿았다.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네 입술에 가렸던 손을 내리고 조금은 익숙해진 눈으로 네 얼굴을 바라봤다. 웃으며 바라보는 네게 살짝의 미간을 찌푸린 것 같다. 침대에 조금 더 붙어있고 싶은 나의 욕심을 네게 손을 뻗어 말한다. 넌 내 손을 잡아줄 거니, 일으켜줄 거니. 부디 옳은 선택을 하기를 바란다면 지금 내 품에 안겨줘.

 

뻗은 내 손이 말하는 의미를 너는 알까.

안기지 않아도 별 상관은 없지만 오늘은 그리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니까, 시간을 느리게 잡아두고 싶은데. 빤히 바라보는 시선 끝에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붉고 파란 눈이 있고, 내 손 끝에는 공기가 맞닿아있으니 어서 나의 손을 잡아 온기를 가득 채워주렴. 나의 작은 박새야. 파란 네 깃털을 자랑하며 빛에 빛나 나의 또 다른 피비가 되어주렴. 이제야 조금 욕심내기 시작한 온기를 채워주어야지. 너는 내 것이니까,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존재‘했던’ 것인가, 존재를 ‘잃은’ 것인가.
정의 내릴 수 없는 잿가루는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져 ‘없던’ 것이 되었다.

공기 너머로 흩어져 보이지 않음으로 존재했다. 어니스트, 나를 기억하는 마지막 존재가 되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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