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데니아

손을 맞잡을 수 있도록.

피자먹고싶은 슈크림빵 2020. 10. 16. 19:12

다음에도,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했으나 홀로 성장한 나는 나 자신을 몰아세우며 사는 법 밖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겪어온 것이 그런 것들 뿐이었기 때문에, 내가 성장한 방향은 그저 나를 절벽으로 떠미는 한걸음이 되었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가족을 버리고 누군가는 내게 큰 기대를 걸지만 나는 무엇을 기대하지도, 버리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이 내 삶에 쓰이는 한 줄의 글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내 삶을 써 내렸다. 욕심을 내어 모든 이들에게 다정을 내세웠고, 무리해서라도 그 뒤를 지켜냈다. 옳지 않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대로도 만족했다.

 

많은 이들의 뒤를 지키며 물러서는 걸음을 계속 하다보니, 어느새 내 걸음의 끝은 절벽에 매달려 있었다. 끊임없이 옳다고 여겨온 나의 글귀들은 엉망진창이었으나, 쏟아진 잉크가 글을 정리했다. 쓸모없는 것들을 가려버릴 수 있도록. 다시금 잉크가 묻은 펜촉은 다음 문장으로 무엇을 써내려야 하는지 방향을 잡을 수 없어서, 한 방울의 혼돈이 페이지에 떨어졌다. 그 혼돈이 어느 방향으로 번져나갈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가 정해진 미래를 떠올리고 싶지 않기에.

 

"... 내가 가진 감정이 두려움이라면요?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이 자리까지 달려왔는데,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면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만 같아서 포기할 수 없다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포기해야 할까요.라고 네게 애달프게 말했다. 내가 또, 누군가에게 작별인사를 건네야 하느냐고. 10년 전에도, 지금도 이 곳에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던 이유는 모든 이들이 살아서 다시 만날 것이라는 이유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내가 이 곳에 서 있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이들에게 다시금 작별 인사를 건네야 하는 때가 온다면 나는 ... ... 누구를 지킬 수 있는거지. 

 

분명히 자라온 태는 달랐으나, 어찌 보면 그 형태는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 자신을 버렸으니, 같은 식이라고 성립해도 되지 않을까. 모두가 한 가지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니, 어떻게 해서는 이 수식을 성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또 하나의 욕심이겠지.- 다정히 아프게 느껴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네 손의 온기가 따스하다고 느껴서 미소를 지었다. 금방 내려간 네 손에 시선을 그리로 옮겨갔지만. 다시금 그 손을 잡아 내린다면 더 이상은 다가갈 수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너를 바라볼 뿐이었다.

 

찌를 칼조차 들지 않는 내가 네게 무엇으로 찔러야 할까.

그저 대가 없는 다정으로 숨을 질식시킬 수는 있을 텐데.


"... 그야, 당신이니까요. 무엇보다 어느 부탁을 하든 그건 다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염려하실 필요는 없어요."

 

너무나도 다른 우리들이 서로에게 묻어나는 이 상황은 퍽 웃음이 지어진다. 서로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다정이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느릿한 시선으로 마주하는 네 눈빛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담겨 있었다. 마주 보아도 무엇하나 알아챌 수 없는. 그래도, 그게 나쁜 것이겠는가. 그럴까요, 얼마든지.

 

제가 내고 있는 이 환한 불빛은 온전히 타인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상대가 있어야 방패든, 빛이든 내비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테니까. 그러니, 나는 오로지 타인을 위해 한걸음을 옮겨냈다. 절벽 끝에 내몰린다 하더라도 꿋꿋하게 걸어 나갔다. 절벽 가까이 당신에게 붙들린 손은 더욱 큰 용기를 안겨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낼 수 있게 했고. 온실에서 옮겨낸 식물은 야생에 가면 금방이라도 파리해질 테지만, 이듬해 봄에 다시금 뿌리를 내리고 살아나는 끈질긴 생명이니까. 나도 당신처럼 우리를 벗어나 더 단단한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을 테지.

 

"그럼요, 당연하죠.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제 곁에 있는 걸 알고 있어요."

 

나는 모든 이에게 대가 없는 다정을 내민다. 그 모든 다정히 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 신경도 쓰지 않으니 어찌보면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도 않을까. 하지만 내가 내민 다정으로 한 사람이 다시 내게 다정을 건넨다면 그건, 이미 내 다정이 아닌 그 사람의 온전한 다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결국 선택한 것은 그 사람의 몫이니까. 당신은 이제서야 자신의 다정을 확립시켰네요.

 

 

 

빛을 잃어가는 나의 아이기스가,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방패가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