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방향을 알아요.
- 플레디오, 당신은 죽어가고 싶잖아요. 살고싶은게 아니잖아.
정말 반대되는 삶을 살아온 나로서는 네가 생각한 일말의 단편이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살아온 그 세계는 희망따위 살기위한 사탕발린 말이었을뿐, 바로 앞에 칼을 들이민 현실이 더욱 짙게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당신과 달리, 이제 스물 셋의 나이였다. 11년이라는 시간의 벽이 가로막은. 내 현실에서의 나는 언제나 타인에 의해 혹은 스스로에게 떠밀려 성숙함을 요구받았다. 책임을 져야하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고, 그 책임을 마땅히 지고 싶어한 저였기에. 나는 스스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흙구덩이를 굴러냈다. 사람이 곁에 있어도 온기를 찾을 수 없었으나 온기를 나눠주었고, 크나큰 행복은 없었지만 소소한 행복이 제 삶의 이유였다. 이런 모든 점들을 따져봤을 때 너와 난 정말, 만날 수 없었던 희미한 인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친 모든 선택이 반대되었으니.
이미 겉으로 흘러넘치는 네 물잔은 이미 나를 적셔냈다. 그러니, 그 얕은 연기는 쉽게 보일 수 밖에.
"강한 사람이랄지, 강하게 맞으며 살아온건지. 내가 겪어온 모든 것을 토대로 나는 내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에요. 내가 원하는건 소중하다고 여기는 당신들의 행복이니까. ...강인하지 않은 사람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는 있을거 아니에요. 당신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뭘 강해지겠다고."
꽤나 강하게 당신에게 말하면서도 그리 날카롭게 베어내는 말을 하지는 못했다. 결국 천성탓에 가로막힌 결과가 이정도인 것이다. 정말 우습게도 사람은 기억을 하고 되새기는 동물인지라 당신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지 못할 것임을, 그 안에 어느 것이든 숨기고 있음이 빤히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으로 더욱이 다가가지 않기 위해 겨우 보이는 선을 아슬히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이 다정을 내비칠 수 있는 상황은 그리 많지 않음을 알고 있다. 모두가 개개인의 사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전부 각자의 두려움이 다르기 때문인걸 알고 있다. 당신의 두려움은 자신의 다정이구나. 하는걸 다시금 깨달았을 뿐이고 곁에 다가가기에는 내 손에 들린 다정이 네게는 가시가 되어 수많은 가시 중의 하나가 될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논제네요... 죽지 못해 살고 있는거라면 죽으면 되잖아요. 단순한 결론이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당신이 겁먹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네요."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신을 할 수 없었지만 다정이 네 두려움이라면, 과거에 붙들려 사는 네 허상이 아직까지도 그런 선택을 하도록 영향을 미치고 있는거라면. '너도 죽음이 두려운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어져 있는 틈새가 있다면, 그 틈 사이에 제 일말의 온기를 끼워볼까 하는 생각도.
"어차피 살아있는 의미도 찾지 못했으면서 강함으로 존재를 증명하려고 한다니... 굳이 존재를 증명해야할 필요가 있을까요, 플레디오. 이미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존재는 증명되어 있는데."
하지만 그 온기가 바로 식어버릴만큼 차가운 물로 둘러쌓인 네게 내 온기를 불어넣기란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네 얼굴에 띄워지는 웃음이 이제 감정이 아닌 연기의 한 축에도 끼어있는 느낌이었고. 제 시선에서 보는 플레디오의 삶은 마치 연극의 한 부분과도 같아서, 겨우 대본을 보며 짜맞추고 있는 것 같은 아마추어의 연극을 보는 듯 했다. 조명이 반짝하면 그 장면은 극대화되어서 관객에게 내비춰지지만 무대의 뒤에서 누구보다 서둘러 발을 움직이고 있을, 그런 연극. 다행인지 나는 아직 무대 밖으로 나서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네가 준 상처에 깊은 상처로 베이지 않음에 감사했다. 이 또한 네가 살기 위했을 하나의 선택이었을테니.
"..그게 다행일까요. 저는 당신에게 작별인사따위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죽지 않기를 바라니까. 낭만을 따져본 적이 없어서... 난 잘 모르겠네요."
웃는 네 모습에 숨겨진이 것이 더욱 그림자를 짙게 까는 듯 했다. 암흑과도 같이, 깊게 가라앉는 것이 과연 진실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저 입 밖으로 나지 않는 네 속내는 무엇일까. 그게 만약 내가 기대하는 것과 동일하다면 나는 네게 손을 내밀어도 되는 것과 같은, 내 오지랖이었다. 제가 보기에 네 모습은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스스로에게 드리운 그림자가 조금이라도 옅어지기라도 하면 무너질까 노심초사한 마음이 앞선다. 이런 판단이 과연 옳은 걸까.
"그래도 당신이 좋다고 하니, 미리 할게요. 꼭 당신의 손으로 나를 죽이기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