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을 흑백의,
아무런 소리도 없이, 안전지대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없이 고요했다.
더 이상 그의 곁에는 온기를 느끼게 해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산송장이 나았을 거라는 그의 말에 도려내진 자신과 오로지 그의 흔적으로 가득한 공책 한 권이 전부였다. 앞으로 걸어갈수록, 그와 멀어질수록, 세상에 존재했던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잃어가듯 천명월화의 눈에 비치는 것은 없었다. 지금, 그의 안에 담긴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어.
짧은 시간이라도 좋으니 남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
뒤에서 무언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음에도 천명월화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 소리는 이미 그를 지나쳐 바스라졌기 때문이었다. 숨쉬기조차 힘든 듯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그는 멈춤 없이 걸어, 높이 솟은 콘크리트 벽 앞에 그 걸음을 멈췄다. 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을 땐 여러 온기가 몰려왔다. 분명히 오랜만에 느꼈을 온기였음에도 그 많은 온기 중에서도 그가 원하는 온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닿은 네 입술이 너무 따뜻해서 더 함께하고 싶었다.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네 온기를 욕심부리면 안 돼.
천명월화는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린 흑백에 세상에 홀로 버려져 작은 숨조차 내쉬는 것을 포기하듯 자신을 잃어갔다. 그의 빛, 그의 모든 것은 천명월화를 악몽으로 밀어 넣고 홀로 서게 만들었다. 모두 천명월화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말을 지껄였지만, 그건 그가 원했던 말이 아니었다. 천명월화가 적어온 모든 페이지의 문장은 그와 함께할 결말을 향해 적히고 있었다. 그 끝에 평화롭게 두 손을 마주 잡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함께 보고, 들어도 질리지 않을 그의 목소리와 함께할 결말이어야 했다. 한 순간에 쏟아져 버린 잉크 탓에 마지막 페이지에는 문장이 적히지 않았다. 그 앞 페이지까지 잉크들이 물들어, 함께 해온 그 온기들도 점차 덮여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가 없는 세상은 숨 쉴 의미조차 없었다.
천명월화, 밤을 밝혀줄 유일한 나의 달.
사랑해, 미안해. 혼자 살아가게 해서 미안해.
천명월화의 손에서 잠시 있던 공책은 몇 가지의 조건과 함께 연합정부의 손에 들어갔다.
첫째는 '모든 치료제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딸 것.', 둘째는 '약이 완성되면 자신을 밖으로 내보낼 것.' 딱 두 가지의 조건을 연합정부는 받아들였다. 천명월화의 손에서 떠나간 그의 마지막 흔적은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쳐 낡아갔다. 그 많은 시간들이 아주 빠르게 흘러, 그와 함께한 시간 위에 덧대어졌다. 숨죽이며 사는 그 시간 동안 모든 사람들이 그 기억을 간직하며 살아가라 말했다. 결국 익숙해질 것이라며, 조금씩 흐려질 것이라며. 하지만 천명월화를 그 기억의 페이지를 끝없이 들춰내고 되새겼다. 흐려질 새도 없이 그 페이지를 읽고, 또 읽으며 과거에 머물렀다. 더 이상 그는 곁에 없었지만 과거에 그는 존재했으니까. 그러니 그는 과거로 향할 것이다. 그가 살아있던 그 시간으로.
곤히 자는 네 모습을 행여 잊을까, 너를 잊을까 겁이 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게 느껴진다.
이제 얼마나 남았지.
다시금 많은 시간이 흘러 봄이 찾아왔다. 땅에서는 새로운 새순이 올라와 제 존재를 뽐냈고, 차가운 봄바람 틈새에서 온기를 찾아 스스로를 싹틔웠다. 땅에 온전히 내린 뿌리가 단단히 박혀 잠시 죽어도 다시금 올라올 것이다. 그와 달리. 돌고 돌아 긴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공책이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너덜 해진 공책에는 여전히 그의 흔적이 남아 따스했다. 온기를 느낄 순 없었지만 그가 존재했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한 장, 한 장 노트를 넘기면 그의 글씨체가 가득히 공책을 메우고 있었다. 분명히 알아볼 수 없는 글들이었지만, 공책에 빼곡히 들어찬 것은 공식만이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내 곁에서 네가 자고 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져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꿈도 꾸지 않는다, 더 이상 차에 치이는 꿈을 꾸지 않아.
혼자 견뎌왔을 시간, 죽어가는 시간들이 적혀있었다.
빠지지 않는 것은 천명월화에 대한 얘기였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뜬 눈으로 지새웠는지 거의 모든 밤의 천명월화가 적혀있었다. 쓰인 문장들은 조금씩 뭉개지며 사랑한다는 단순한 얘기들로 메워지기 시작했지만, 그 사랑에 담긴 모든 의미는 달랐다. 이 곳에 적힌 사랑은 매달림이었다. 이 페이지에 적힌 사랑은 욕심이었고, 이 페이지에 적힌 사랑은 속죄였다. 이기적인 선택을 한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이기심이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빠르게 넘어간 공책의 마지막 장에는 치료제가 아닌, 천명월화를 향한 말이 쓰여있었다.
혼자 깰 모든 아침들에 매일 새로운 햇살을 비출게. 그 모든 온기에 스며들어 있을게.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듯 바람에 같이 날아갈게. 다시금 피는 꽃 위에 화려히 너를 바라보고 있을게.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모든 계절의 틈 사이에 새로운 나로 찾아갈게. 사랑해, 월화야.
이기적인 말.
그건 거짓말이었다. 결국 찾아오지 못했을 거면서.
천명월화는 덤덤히 그 페이지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준아. 혼자 잠에서 깨는 나에겐 햇살이란 없었단다. 모든 것이 암흑이고, 모든 것이 흑백이었다.
부는 바람은 그저 칼같이 아팠고, 피어나는 꽃들은 다시금 돌아오질 못하는 널 그리워하는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네가 없는 이곳엔 모든 게 겨울이구나. 나는 나의 빛과 색과 계절을 찾기 위해 돌아가노라.
서로에게 답장을 한 마지막 인사는 서로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공책에 쓰였다.
이건 정말 마지막 페이지라고 할 수 있을까. 책에 쓰인 모든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잃었고, 모든 것을 잃었는데. 함께해온 시간들은 달리고 달려 이 순간을 위해 그리 빠르게 흘러왔던 걸까. 이리 아프게 하기 위해 쓰여왔던 걸까. 결국 그 해답은 찾지 못했다. 천명월화는 함께 걸어온 길을 되돌아갔다. 그 길에 무엇이 있든 두려움 따위는 느끼지 않고 오롯이 그를 위해 걸어갔다. 과거로 걸어가는 그 길은 어느 때보다 온기가 흘러넘쳐, 더 이상의 외로움은 희미해져 가는 듯했다. 들판에 피어난 꽃들이 응원하듯 제 색을 뽐내고 불어오는 바람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스쳤다. 정말로 그 끝에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듯.
"안녕."
허공에 외치는 그 말이 부디 그에게 닿기를 바라는 것처럼 천명월화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손가락에 끼워진 꽃반지가, 걸어온 새하얀 들판이 마치 두 사람의 결혼식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다시는 없을 하나뿐인, 다시는 못할 한 번뿐인 이 결혼식을 그는 홀로 걸었다. 손 끝에 닿아오는 바람에 그는 두 눈을 감았고 마치 그가 곁에 있다는 것처럼 손을 뻗어냈다.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고 손가락 틈새로 빠지는 바람이 마치 손을 마주 잡는 듯했다. 정말로 그가 바람에 날아오는 것처럼. 떠오르는 해의 온기가 마주 안은 그의 체온을 대신했고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따스하고 평화로웠다. 완전히 동이 터오고 귓가에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올 때, 얌전히 그 길에 멈춰 섰다. 이 곳이 길의 끝, 네게로 달려갈 마지막 걸음이다. 몸을 물어뜯는 감각을 가볍게 무시한 채, 천명월화는 그에게 돌아갔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귓가에 울리는 것은.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