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넬 E. 베르폰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피자먹고싶은 슈크림빵 2020. 5. 18. 04:49

겨울의 시간은 지나갔고, 새로운 새순이 돋아 땅을 초록빛으로 물들 준비를 했다. 얼었던 땅들이 조금씩 축축해지며 흙빛을 드러내고 하늘에 뜬 해는 조금 더 길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매일 밤 잠을 자지 못하는 이그넬은 오늘도 어김없이 저택을 벗어나 추운 겨울바람을 폐에 가득 채울 것이다. 수평선 너머로 무언가의 빛이 보일 때쯤 이그넬은 그 어느 걸음보다 가볍게 침실로 미끄러질 것이고 베르폰 영지 내에서의 시간을 그렇게 시작할 것이다.


조금씩 봄이 다가오고 있지만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햇빛은 따뜻해지고 있으나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나 바람이 차갑기 때문에 누군가 아프기에 제격인 날씨였다. 그렇게 2월, 조금 이른 봄의 시작은 이그넬 감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그넬은 평소와 달리 조금 달아오른 낯빛으로 아침 인사를 건넸고, 그 열기를 눈치채지 못할 어니스트가 아니었다. 이마를 맞대고 이그넬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어니스트의 입이 열리고 걱정이 공기를 통해 퍼졌다.

 

"주인님, 감기 걸린 것 같은데."

 

조금은 가라앉았을까. 명백히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를 이그넬이 그의 시선을 피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다시 맞춰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늘어놓는 변명은 어니스트에게 통하지 않을 변명이었다. 일을 하러 가야 한다며 맞춰진 시선에 또다시 피하며 몸을 돌리지만 어니스트는 이그넬의 걸음을 막아세웠다. 거의 보지 못할 단호한 말투로 돌아가라는 일침을 하는 그의 말에 이그 넬은 싫다는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어니스트는 입을 열었다.

 

"분명 감기라니까, 얼른 가서 누워."

 

분명 그리 맘에 들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이그넬은 가볍게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러나 이그넬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본인의 침실이었다. 몇 걸음 걷지 않고 복도에 그대로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이미 열이 많이 올랐다고 보여주듯 이그넬은 불덩이 같았다. 색색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친 숨을 쉬는 이그넬은 땀을 흘리며 스스로와 싸우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니스트는 곁을 지키며 간호했지만 쉽사리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함께 해온 시간동안 처음보는 약한 이그넬의 모습은 어니스트를 겁먹게 하는 데에 힘을 실었다.

 3일 정도가 지났을까, 여전히 열은 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새벽 무렵쯤 눈을 뜬 이그넬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이불을 감싸 안고 방의 창을 열었다. 차가운 새벽의 겨울 공기는 이그넬의 열로 가득 찬 방을 휩쓸었다. 순식간에 떨어진 공기는 서늘했지만 이그넬에게는 시원했다. 창가 아래에 몸을 기대고 불어오는 바람에 이그넬은 자신의 열을 내리기 시작했다. 시선을 돌리자, 언제 잠든 것인지 침대 아래에 애매하게 누워 잠자고 있는 어니스트를 봤다. 이그넬은 어기적 기어가 그의 등에 바짝 이마를 가져다 대자,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자장가보다 감미로운 심장소리는 이그넬의 얼굴에 가볍게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이불 밖으로 살짝 나온 팔은 어니스트의 허리를 감싸고 열린 창문은 바람에 삐그덕 대지만 눈을 감은 이그넬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어니스트의 심장소리일 뿐이니까.

 

 

 

아침의 해가 찾아오고 점심이 오기 전인 아침에 어니스트는 두 눈을 떴다. 허리에 감긴 팔에 당황한 기색이 분명했지만 이그넬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창문은 열려있고, 이불에 말려 여전히 잠을 자는 이그넬은 가장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잠을 자고 있었다. 어니스트는 이그넬의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쟀고, 떨어진 체온에 작은 안심을 했다. 이그넬은 이마에 닿은 손길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편안하게 잠을 잤다. 어니스트는 미처 창문을 닫을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같이 누워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보기 힘든 표정을 눈에 담아내기 위함이었을까 빤히 바라보던 시선은 손으로 이어져 그의 머리카락을 넘겼고 이그넬은 눈을 떴다. 반쯤 떴던 눈은 빙글 돌아 어니스트를 바라봤고 몸을 돌리며 기지개를 켰다. 눈을 꾹 감았다가 베싯 웃으며 시선을 맞추는 이그넬은 한결 몸이 가벼워 보였다.

 

"좋은 아침."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는 목을 긁는 듯했지만 이그넬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어니스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니스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내려다보며 가벼운 버드 키스를 남겼고, 손을 내밀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짧은 입맞춤은 충분한 인사였을 것이다. 둘이 맞잡은 손은 단단히도 얽혔고 이그넬은 몸을 일으켜 어니스트의 품에 들어갔다. 어딘가 불편한 듯 미간을 찌푸렸고 완전히 몸을 기대, 금방이라도 그의 목에 입술이 닿을 듯했다.

 

"어지러워."

 

꽤나 단단히 붙잡은 손과 이그넬의 허리를 감싼 어니스트의 팔에 이그넬은 편안해 보였다. 분명히 별반 다를 것 없는 몸집이었지만 며칠 앓았던 탓에 이그넬은 조금 왜소해 보였다. 어니스트는 이그넬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얹고 놓지 않으려는 듯 제 쪽으로 좀 더 끌어당겼다.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만큼 붙고 나서야 그는 머리를 부빗대며 입을 열었다.

 

"열은 내렸으니까 곧 괜찮아질 거야. 배고프진 않고?"

 

방금 막 일어나서 그런탓인지 이그넬은 평소와 달리 조금의 어리광을 부렸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몸에 힘을 풀었다. 평소에는 잘 오지 않던 잠이라도 오는 것인지 이그넬은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른해지려는 듯 했다. 아침의 햇빛이 어느새 창문을 통해 안쪽으로 들어오고 새소리들이 퍼졌다. 뜨거웠던 봄의 시작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 싶었다. 밀린 일들을 몰아서 처리하려고 했던 탓인지 이그넬은 환절기 동안 두어 차례 더 앓았다. 평생 아플 병을 다 앓는 것 마냥. 놀랍게도 환절기가 끝나감과 동시에 평소보다 더 활기를 되찾았다. 정말로 활기를 되찾은 걸까. 그 속내를 누가 알까.

 


새순이 돋아난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베르폰의 영지는 녹음이 우거져 초록으로 가득 찼다. 파릇하게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 풀들은 각자의 키를 뽐내며 무성히도 자랐다. 몇몇 나무는 열매를 맺고, 어느 나무들은 풍성히 나뭇잎을 자랑했다. 건조한 여름의 하루에 그늘 아래에서 싱그러운 시간을 보내는 이그넬은 나무에 기대, 멀리서 걸어오는 어니스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니스트는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헐렁한 옷이 힐끗 그의 속살을 들추지만 신경쓰지 않고 오직 이그넬을 향해 걷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익숙한듯 서로 가까이 앉았다. 여름임에도 나무 그늘 아래는 서늘했다.

 

이그넬은 그에게 등을 돌리며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어니언, 머리 묶어줘."

 

이그넬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얌전히 머리를 묶어주기를 기다렸다. 그는 자연스레 이그넬의 머리카락을 쓸어 한데 모았다. 모아진 머리카락에 얇다면 얇을 목선이 드러나고 잔머리들이 바람결에 날렸다. 어니스트는 조이지는 않으나 그리 느슨하지 않게 이그넬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쥐었다. 제 머리를 고정하고 있는 하나뿐인 자신의 머리끈을 풀자, 그의 초록빛이 도는 머리카락은 허공에 흩날렸다. 다른 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같은 머리끝으로 묶이고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짓는 이그넬이 몸을 다시 돌리기 전, 어니스트는 그의 뒷덜미에 진한 키스를 남겼다. 빨갛게 자국이 남을만큼 진하게 키스를 하고 만족스러운듯 손가락으로 자국을 쓸어내렸다. 이그넬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손을 더듬어 자국을 만졌다. 느껴지는 온기가 꽤나 선명했다. 이그넬이 몸을 돌려 어니스트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키스하고 싶었어. 입술은 다음에."

 

정말 태연히도 대답하는 어니스트를 빤히 바라보며 이그넬은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상관없다는 듯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어니스트와 이그넬은 서로에게 가까이 붙어 앞의 바닷가를 바라봤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분명히 같은 바다였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어느새 어니스트에게 기대있던 이그넬은 허리를 일으켜 세우며 기지개를 켰다. 신고 있던 신발을 왼쪽부터 벗고는 가지런히 나무에 기대 놓았다. 신난 표정도, 재미없다는 표정도 아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어니스트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바다 들어가자."

 

짧은 한 마디. 친구로서, 어쩌면 주인으로서 내리는 명령 같은 어투로 하고는 어니스트의 신발을 턱짓했다. 어니스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발을 벗어던졌고, 바짓단을 걷어올렸다.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 내밀어진 이그넬의 손을 맞잡고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뜨거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고, 이어서 청량한 파도 소리가 공기를 타고 들어왔다. 자연스레 두 사람은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그넬은 먼저 앞서 걸으며 바닷물에 발을 담궜고, 곧이어 어니스트로 같이 발을 담궜다. 걷어올린 바짓단은 그 의미를 잃어 조금씩 젖어들어갔고, 어느새 두 사람은 상의 아랫부분까지 적신 상태였다. 잡고 있던 서로의 손을 놓고 이그넬은 허리만큼 물이 차오를 때까지 깊게 들어갔다.

 

"어니언, 여기까지 와볼래? 그렇게 깊지 않아."

 

어니스트에게 손을 내밀며 권유하는 이그넬의 표정은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어니스트는 이그넬이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손을 뻗은 이그넬의 손을 잡으려 다가가는 순간 이그넬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이제는 가슴 아래까지 오는 물에도 이그넬은 조금씩 물러났다. 어니스트는 자리에 멈춰서서 너무 깊이 가지말라고 말했고, 이그넬은 알았다며 자리에 멈춰 섰다.

 

"어니언, 나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이야. 수영 정도는 할 수 있고."

 

마치 보여주기라도 하듯 다가가기도 전에 이그넬은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짧은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수면 밖으로 나온 이그넬은 당당한 표정으로 걱정하지 말라는 듯 얘기했다. 어니스트가 잠시 팔을 휘저으며 가는 순간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이그넬은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어니스트는 그가 수면 위로 나오기를 잠시 기다렸지만, 이그넬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니스트는 그 어떤 때보다 빠른 속도로 이그넬이 있던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금세 목까지 차오른 바닷물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이그넬을 제 손으로 잡아올렸다. 그대로 얕은 곳까지 끌려나온 이그넬은 잠시 휘청이다가 어니언에게 몸을 기댔다. 어니스트의 눈에서는 바닷물 일지 모르는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이그넬에게 언성을 높였다.

 

"넬! 지금 뭐 하는 거야!"

 

화가 아닌 진심 어린 걱정에서 나오는 소리였고 어니스트는 강하게 이그넬을 붙잡고 있었다. 다시는 놓지 않을 거라는 듯 아주 강하게. 이그넬은 그런 어니스트를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고, 다행이라는 듯한 손길로 어니스트의 볼을 감싸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그넬은 젖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웃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어니언, 키스해줘."

 

이 상황에 키스해달라고 말하는 이그넬의 눈에는 어니스트가 담겨있었다. 어니스트의 눈은 눈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 안에 이그넬이 비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그넬은 어서 해달라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어니스트를 바라봤고, 그에 응하듯 어니스트는 입술을 겹쳤다. 눈을 감아 서로를 옭아맸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을 탐하듯 둘은 떨어지지 않았다. 짭짤한 바닷물이 피부를 흘러 두 사람의 입 안에 스며들었고, 어니스트의 흐르는 눈물이 밍밍하게만 느껴졌다. 분명히 입술이 닿고 무언가 맞닿아있음이 분명했다. 어느 정도까지 다가갔는지는 이그넬만이 알겠지만 두 사람은 입술 이상으로 얽혔다는 것을 직감했다. 짧지 않았던 키스를 마치니, 이그넬은 어느새 제 발로 서서 어니스트를 뒷목을 감싸고 있었고 고르는 숨결이 그리 일정하지 않았다. 이그넬은 재밌다는 듯 푸흡하고 웃음을 터트렸고, 여전히 눈물이 흐르는 어니스트의 눈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어니스트와 이그넬은 서로 눈을 마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정하지 않은 심장 소리가 파도 소리를 집어삼키고 정적이 흘렀다. 그때 어니스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넬, 그러지 마."

 

애절한 듯한 어니스트의 목소리는 조금 분위기를 가라앉혔지만 이그넬은 어니스트의 두 뺨을 감싸고 또 다시 키스를 했다. 마치 여기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짧게. 이그넬은 어니스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고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입술에 하는 키스에 다음을 기약하지 마."

 

두 사람의 여름날은 이렇게 시작됐다. 끝맺지 못한 이그넬의 죽음과 누군가의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