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넬 E. 베르폰

온기가 떠나지 않는다면

피자먹고싶은 슈크림빵 2020. 5. 7. 16:52

(*posty.pe/5lofuy)

왜 너와 나는 이리도 가까이 붙어있음에도 모순된 관계에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인지. 나와 네가 생각하는 죽음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이 속 안에서 꽤나 쓰게 다가온다. 나는 이미 죽음에 무뎌져 상관없지만, 너는 그 죽음의 의미가 도피처인지 또 하나의 선택인지. 나는 그 속내를 알 길이 없다. 많은 질문과 물음표는 또다시 내 어둠에 던져두고 나는 '다정'의 가면을 쓰고 네 곁을 지킨다.

 

"... 원래 잃는 것은 두려운 거야. 내가 한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거 너도 알잖아.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그리 쉽게 잊을 수가 있겠냐고. 슬픔을 사람을 가둬둘 뿐이야. 그러니 기억하되 너무 묶여있지 말란 소리잖아. 남의 죽음을 우리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까."

 

잔인하게도 아물지 않은 내 상처들 위로 더 그어봤자 달라지는 것이 없으니까.

한순간의 고통은 금세 또 무뎌지게 될 거고 나는 또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며 그들을 조금씩 잊어갈 테니까. 차라리 나를 원망을 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말도 안 되는 환상을 품어보나, 너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나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 더 제 품에 기대는 너를 안아주는 것밖에 못하는 나 자신이 그리도 한심했다. 내밀고 싶어 지는 손이 모래라서, 나는 쉽사리 너를 붙잡을 수 없다. 잡힌다면 다행이겠지만 너까지 내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싶지 않아.

 

"..."

 

특별한 사람. 우리도 그 특별한 사람인데, 단지 제 안의 흉터들에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고 나아가지 못하는 거잖아.

 

"그럼 내가 손을 내밀 테니 잡아줄래. 그들이 우리를 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서로를 보면 되는 일이잖아. 특별한 사람은 그 사람들끼리 나아가라 그래. 네가 그걸 못하겠다면... 날 밟고 일어서. 그러면 될 것 같아? 내가 널 선택할게. 그러면 일어날 거냐고."

 

처음. 그리고 마지막.

나는 지금까지의 삶 중 가장 큰 용기를 내어 네게 묻는다. 만약 내가 내민 손을 잡아준다면 우리는 조금 더 나은 길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 기대를 품기 시작했으므로. 이제야 겨우 나는 뒤늦게 후회를 하기 시작했고, 그 첫 번째로 너를 내 선에 들일 준비를 한다. 그 선택은 내 몫이 아니니 나는 그저 조금 흐릿하게 선을 지우고 너를 기다릴 뿐. 어둡게 심연에 내려앉아있던 나는 조금씩 수면으로 휩쓸리는 듯하다. 물 너머로 일렁이는 해가 조금씩 희미하게 보이는 듯해서 나는 조금 더 발버둥을 쳐보기로 했다.

 

"... 스스로를 버리지 않았으면 하니까. 서로를 지키다가 먼저 떠나버리면 남은 사람은. 그러면 어떡할 건데. 결국 서로는 자신을 지키면서 팔을 뻗어주는 것뿐이야. 목숨을, 다른 사람에게 바치지 마. 그 사람이 네 삶의 이유가 아니라면 그 선택은 잘못된 거지."

 

나를 향했던 칼날이 조금씩 네게 드러난다.

 

"차라리 우리를 버려. 그게 살아갈 길이야. 그러니 한 번 놓을 용기를 내어봐, 스스로를 지켜. 이 길을 계속 걸어가려면 추악해져야 해. 다른 선택을 한다는 건 언제나 어렵고 두려우니까 부디 너를 선택해줘...."

 

마지막의 질문에는 나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 끝에 이미 나는 닿아있으니까. 바다의 끝은 빛이 닿지 않아서 비추는 것 없이 어둠만이 가득하지만, 빛이 없기에 굴절 없이 그 깊이를 잘 보여준다. 그 바닥에 발이 닿아있으니 나는 수면 위를 바라볼 뿐이다. 또 누군가가 떨어지면 나를 밟고 다시 올라갈 수 있도록. 아마 그 첫 번째는 푸시에, 네가 될 것 같아. 그러니 너를 선택하고 나를 짓밟아. 내 손을 잡아.

 

입술을 잘게 씹는 너를 빤히 바라봤다. 맺히는 피들이 흐르지 못하고 네 입 안으로 삼켜진다. 그게 네 감정이겠지.

 

"푸시에, 현실을 직시해. 도망치더라도 네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무슨 길인지는 제대로 보고 걸어야지. 눈먼 장님처럼 눈을 가리고 어느 길을 선택할 건데?"

 

죽음은 네게 '탈출구'라는 의미구나.

 

어째서 나는 네게 매달리고 있는 거지. 나의 다정은 그냥 또 다른 가면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피부에 스며들어 그 가면이 내 얼굴이 된 기분이다. 부디 너를 잃지 않기를. 제발. 모두를 잃지 않기를.

 

"...감당은 내가 할 테니, 죽지 마."

 

정말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감당일까.

왜 나는 자꾸 되지도 않는 책임을 지려고 하는 거지.

 

"겨우 너 때문에 내가 처음으로 슬픔을 느껴. 그런 말들이 이제 조금씩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나 봐. 내가 우는 게 싫으면 제발... 나한테 그런 말 하지 마."

 

이기심이 들었다. 나는 정말 너희들을, 너를 잡을 순 없는 걸까. 우리는 왜 이렇게 만나서 이런 결말을 쓰고 있는 걸까. 책의 커버와 속지는 있지만, 그 안의 내용들이 지워진 기분이다. 더 이상 그 내용 따위 중요치 않아. 마지막 문장이 부디, 죽음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해피엔딩을 바라지 않을 테니. 제발 모두가 스스로 마지막 문장을 써 내릴 수 있도록.

 

"내가, 될 수 있는 한 오래. 네가 살아있는 한 오래 옆에 있을게. 그렇게 네가 살 수 있다면 내가 계속 있을게. 그럼 된 거야?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해. 용서할 것도 없으니까 나한테 용서를 구하지 마."

 

나는 이미 바닷속 깊숙이 가라앉은 사람이라 한없이 차갑고 어둡다. 네가 도망치는 길 끝에 내가 서 있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너를 깊게 삼킬 테지만 나는 널 이 길로 도망치게 할 생각이 없어. 내가 걸어온 길을 따라 너까지 이 지옥으로 떨어질 필요 없어. 햇빛에 네 색깔을 비추며 천천히 수면을 떠다녀주렴.

 

짧은 입맞춤 끝에 나는 네게 조금 매달렸다. 아니 계속 매달리고 있었지만. 입술에 닿은 알 수 없는 그것들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남기려 나는 네 품에 파고든다. 제 품에 너를 다시 안고 어깨에 고개를 묻고. 그 이상 다가가지 않는다. 정말 내 욕심이 될 테니, 그저 품에 온기를 더 각인시키는 것으로 만족한다.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