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넬 E. 베르폰

섞여버린 심연의 색.

피자먹고싶은 슈크림빵 2020. 5. 7. 16:47

모든 것이 나의 우선이 될 수 없었다. 내 첫번째에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닌데, 어느 누가 나의 우선이 되겠는가. 내가 쌓아온 것이 이제야 겨우, 공책 한 권의 분량이다. 길어봐야 두 권이려나. 내 삶은 언제나 다른 곳에 쓰여왔으니 이 정도가 딱 적당한 것이겠지. 내가 가지고 있는 오롯이 있는 나의 공책 두 권에는 분명 네 이름도 새겨져 있다. 행복이라 깨달은 것에 네 얼굴이 그려지니까. 그러니 나는 너를 무시할수도, 내칠 수도 없다.

 

"지금도 조르고 있지 않던가. 그 때의 나는 나무 아래에서 낮잠자는 것을 즐겼으니까. 혼자 있어도 어디선가 네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네 곁에 오긴 했지. 참 느긋한 휴식 시간이긴 했어."

 

제 손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는 네 모습을 빤히 지켜보다가 네 턱을 잡고 당겨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해주며 싱긋 웃어. 굳이 왜, 손에만 하냐는 말을 덧붙이고.

 

"쓰다듬어줘서 그런걸수도."

 

네 말을 잠자코 들으며 지나온 날들의 하루를 그린다.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끝없이 과거를 거슬러올라가 10년은 더 된 일을 되짚고 있자니 무언가 미묘한 기분이었다. 우리가 그리도 함께한 시간들이 길었던가. 내 기억에는 아주 짧게 기억되고 있었는데. 재잘거리는 네 모습은 조금은 힘이 빠지는 듯 해보였다. 내 기분탓이라 믿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한다.

 

"나한테서 아직도 바다향이 짙게 베어있을텐데. 그 날의 하루 아니, 이틀이라고 해야하나. 그 날들은 내 첫번째 자유이자 마지막의 추억이었어. 덕분에 나는 조금 더 베르폰에 닿은 네 색을 쫓아봤고. 그 날은 유독 덜컹거리던 창틀이 잠잠하더라. 절벽을 내치던 파도소리가 네 노래에 묻혀 내 귓가를 때리지 않았어. 정말 집에서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을만큼. ...어떤 미래일지라도 나도, 그 날의 기억을 잊지 못해."

 

고작 붉은 뱀 한마리가 베르폰의 색을 입힌 것은 경이로웠으니까.

 

"그라티아, 우리 슬리데린의 작은 빨간 뱀. 죽는 그 결말을 써내리는 건 네 선택이니까 나는 더 말을 얹을 수 없지만.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어. 그러니, 나 또한 이리도 잘 알고 있는걸테고. 그러니 네가 선택한 그 길이 힘들더라도 나아가. 그 길에 우리들의 죽음이 깔려있더라도."

 

정녕 이게 네게 해줘도 되는 말인지 말을 다 뱉은 후에야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없을 것이라 단정지었다. 정말 죽음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나중에라도 죽음이 두렵다며 제 품에 달려들 것만 같으나, 그건 네 과거이지 현재는 아니니까. 이 곳에 서 있는 내가 나의 목숨을 줄 수는 없어도 네 선택에 대한 지지는 해줄 수 있으니 정말 딱 거기까지만.

 

"정말 이런 어둠에 달려들고 싶은거야?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닐텐데."

 

내 어둠에 삼켜진 모든 이들은 얌전히 내 안에 있어, 흐릿해진 기억들과는 별개로 아주 선명히 나를 옥죄이거든. 내 어둠안에 너가 들어온다면, 나는 조금은 더 불사질러지려나. 꽤나 아프겠네.

 

"그게 네 행복이었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너무 오래 빠져있으면 아주 무뎌지고 네 눈을 가리는 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은 알고 있고. 그라티아, 괜찮으니까 하고싶은대로 마음껏 달려들고 불사질러. 그게 불나방같은 네 길이라면 그래야하는게 옳잖아."

 

어딘가 모순됐음을 깨달았지만 뭔들 어떠하랴, 선택을 지지하는 것 밖에 나는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