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돋힌
애초에 말의 시작부터 이 대화는 내가 이기지 못할 논쟁이었다. 나는 내 선택에 확신이 없었으니, 네 말에 완벽히 타당한 근거를 들어 반박할 수 없었다. 아니, 네 말이 맞다고 이해했으나 부정하고 있다는게 더 맞는 말이겠지.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모든 것들은 이 순간을 위해 걸어온 것일까. 다른 길없이 나는 이 길을 걷는다. 쓸모를 증명한 순혈은 우위에 서있는 것이 내 세계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결국에 선조들이 쌓은 그 위상조차 순혈들이 쌓아올린 것에는 변함없어. 네 말대로 후자를 따른다면, 유능한 쪽은 순혈이 맞잖아. 내가 그 정평난 마법사 가문의 자제는 아니지만, 그들은 순혈이야."
순혈의 피는 다른 이들의 피와 다를 바 없지만, 그들이 쌓아온 피의 그물은 그 어떤 것보다 결속력있다. 오래 전부터 쌓아온 이 탑을 무너트리는 것을 그리 쉽지만은 않은 일일텐데. 너희는 너희를 흩뿌리며 탑의 그물을 녹이는구나.
나는 피가 모든 것을 선택하고 우위에 설 수 있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순혈들 가운데서도 제 쓸모를 드러내지 못하는 자들이 많으니까. 나는 그런 이들이 순혈의 피를 가진것을 부끄러워 해야한다고 보아왔다. 아니, 본능적으로 각인되었다. 어린 시절 내가 보아온 것들은 그랬으니까. 가차없이 내쳐지는 것들 사이, 내가 들어가는게 두려워 나는 살 길을 찾아 발버둥쳤다. 그게 옳지 못한 길이라도 나를 숨쉬게 하는 길임에는 틀림없으니까. 피가 모든 것을 선택하진 않지만, 결국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순혈이었다.
"같잖은 동정은 필요없어. 애초에 어느 누가 그리 말하는 네 말에 발끈하지 않을까. 신념이 달랐다 해도 이미 이 쪽에 서있는 내가 다른 신념을 가졌다고 너한테 증명할 이유가 없잖아."
욱신거리는 내 목은 가라앉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그 선을 따라 두근대는 맥박을 나는 느끼고 있다. 네 시선을 무엇도 담지 않은채 나를 향하고, 나 또한 그 무엇도 비치지 않은 채 허공을 응시한다. 낮게 조소하는 네 말들은 그리 아프지 않았다. 이미 무뎌진 상처에 더 깊게 칼날을 덧대도 느껴지는 것은 없으니. '더러운'놈들이라. 난 너희들은 더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사상을 이해할 수 있냐는 말에 나는 대답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다른 생각, 다른 목적을 가지고 서로의 반대에 서 있는데 나는 굳이 너를 이해시키려 입을 벌려야할까. 우리는 서로에게 발악하고 있잖아.
"글쎄, 너희들이 테러를 일삼는 집단도 아니고, 이 쪽을 저지하기 위해 있다고 해도 오늘의 일을 봐. 우리 쪽의 사람은 하나 죽어 나갔고 너희들의 대부분이 폭력적으로 굴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없어. 너희는 속죄한다는 이름 하에 자신의 죄가 가벼워지는 것마냥 구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 외면을 마주보는 개념은 아예 다르지. 근데 속죄해서 죄가 가벼워지던가."
'그들'. 내가 같은 편에 서 있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 나는 굳이 이 사람들과 차별화되어 지칭될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결국 이들과 한 편에서 행동하는건 다름없는데. 내가 가진 이 이념은 '그들'과 다른 이념이다. 그러나, 그들과 다를 바 없다. 결국 나도 내 이득을 위해 행동하고 있으니까. 나는 갈팡질팡 내 생각에 정착지를 찾지못하고 네게 정리되지 않은 말을 내뱉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이미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으니, 댓가를 치뤄야한다.
"예의는 이 쪽에서도 갖출 수 있는거라. ...그들은 어떻게 나올지 몰라도 최소한 너희 쪽 아이들이 죽었을 때 고개를 숙일 양심은 있어."
아직 붙잡혀 있는 나의 기억에 너희들은 아무도 없는 나의 세계 속 유일한 숨구멍이니까. 그러나 나는 이 기억들은 전부 간직할 자신이 없으니 하나하나 놓아야한다. 이미 한 명을 잊었으니, 그 다음 차례는 너일까. 서로에게 지팡이를 겨누는 일이 그리 내키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이 길을 선택한 결과인 것을. 나는 네 삶을 해치려 드는 테러리스트 집단에 지나지 않잖아.
나는 끝까지 오만하다.
네가 묻는 마지막 말은 정말 단번에 심장을 관통하여 내 시간을 멎게 했다. 다시금 내가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질문. 과연 나는 이 길의 선택에 후회가 없는가. 하지만 나는 그쯤에서 생각을 멈춘다. 내 선택에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그 방향으로 걸을 수 없으니까. 내 손에는 이미 많은 피가 흘러내려 스며들었고, 변화를 받아들일 방법을 모른다. 나는 나약하고 겁이 많은 인간이며, 제 손으로 눈을 가린 거짓말쟁이니까. 나는 나대로의 길을 걸을테니, 너는 전력을 다해 선택을 지키렴.
"아델버트, 내게서 가능성을 보아도 모른척 해. 그 끝을 책임질게 아니라면 못본 척 해. 뒤늦게 내가 이 길이 잘못됐음을 깨닫더라도 그건 내가 치뤄야할 죗값일테니까."
미안해, 나는 바꿀 생각없어.